K53

Lm.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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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30일

 

예레미야 애가  3장 40-66: [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42]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43]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족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44]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5]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46]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47]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51]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52]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 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 그들이 앉으나 서사 나를 조롱하여 노래한느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마가복음 9장 16-24절: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 지는 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 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 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그 웅덩이를 생각하며 다시 우는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해 두 번이나 깊은 웅덩이에 가두어 진 적이 있습니다. 렘 37.16, 38.6.. 오늘 본문에서 우울함이 도진 시인의 토로는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키고 있지요. 예레미야 애가 3장 53절에 기록된 구덩이는 요나단의 집에 시설된 감옥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삼았을 때, 애굽에서 바로의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문이 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바벨론 군대는 포위를 풀고 아마도 다메섹으로 간 것 같습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잠깐 평화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문들이 열리고 그 곳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레미야도 고향인 아나돗으로 가려고 벤야민 문으로 나오다가 문지기장인 아리야(셀레마의 아들)에게 잡혀 감옥으로 사용하던 요나단의 집으로 끌려 갔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뚜껑을 씌운 웅덩이 속에 들어가서 여러 날 있었습니다. 다행히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비밀리 불러 이것저것 물어본 뒤 그를 감옥의 뜰에 머물게 하고 매일 떡 한 개를 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감옥 뜰에서도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했고 유다왕국은 아무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관리들은 그를 감옥에 있는 ‘왕의 아들 말가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 구덩이가 얼마나 깊었는지 예레미야는 줄로 달아내렸다고 합니다. 그 구덩이 아래는 진창이어서 예레미야는 진창에 빠져서 살았습니다.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지요. 이때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의 죽음을 염려하여 시드기야 왕에게 그를 구하자고 간청 했고 결국 줄과 옷 등으로 예레미야를 웅덩이에서 끌어 냈습니다. 이후 예레미야는 감옥이 아니라 시위대 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왕이 직접 볼 수 있는 곳에 머물게 되었으니 그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을 만나서 여전히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후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의 지시대로 관리들에게 요나단의 집, 즉 감옥으로 되돌아 가지 않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렘 38.28에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감옥 뜰은 시위대 뜰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방법으로 예레미야의 생명을 지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를 죽이려 했던 사람들은 결국 바벨론 군대에게 잡혀 가서 모진 고초를 당한 후에 이방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유다의 잔존 세력을 따라 이집트로 가서 거기서 죽었습니다. 자기 땅에서 임종을 맞을 수 없었던 그들… 이후 참 덧 없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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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도할 장소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와 보니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더불어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변론은 헬라어로 ‘수제테오’로 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이 잘 하는 것이지요. 하브루타 같은 것입니다. 아마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겁니다. “너희 선생이 메시야라면 이 아이의 병쯤은 고쳐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이 어릴 때에 귀신에 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자 서기관들이 이때다! 하고 나섰습니다. 서기관들에 비해 말도 제대로 못하고 또한 능력도 없는 제자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물으셨지요. “뭘 가지고 그들과  함께 수제테오를 벌이고 있는 것이지?”

그때 귀신에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섰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 아들 속에 들어있는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했는데 그들이 그걸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제자들 뿐만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정을 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귀신 들린 아이의 상태는 심각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그는 예수님 앞에서도 가정법을 써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앞 부분은 의심이고 뒷 부분은 동냥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요구한 것이지요.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믿음 없음에 대한 후회였을까요? 아니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다급한 생각이었을까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예수님과 군중은 그 아버지의 목소리에 진정성과 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제압하고 있던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날 밤,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였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해 보면, “이런 종류는 아무 것도 나가도록 작동하지 않는다. 기도 안에 없다면.”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서 특이한 점은 기도를 도구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장소나 환경이나 조건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관계 구절로 사도행전 16장 16절이 제시되더군요. 바울과 실라의 빌립보 전도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강가에서 기도할 곳을 찾았습니다. 이후 바울과 실라는 바로 그 기도할 곳으로 가다가 그 여종을 만나서 그 속에 있던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은 귀신의 힘으로 점을 치던 사람이었고 그 주인은 이로 인해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밤중에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고… 이러저러 하여 결국 간수와 그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실라가 기도할 곳으로 가다가 이런 일을 만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기도할 수 있는 장소, 환경, 또는 조건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 환경, 조건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기도라 합니다. 기도의 범위가 꽤 크지요. 하지만 기도는 무당도 할 수 있고, 불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기도란 말을 쓰지요.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기도할 수 있는 장소, 환경, 조건은 무당이나 불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장소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기도 또는 기도할 수 있는 곳은 매우 신비스러운 현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가치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그 신비스러움을 우리는 기도 또는 기도할 수 있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두신 ‘토브’한 영역이지요. ‘이런 곳에서, 또는 이런 영역에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호렙 산 어귀에 있는 떨기나무에 임재하셨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떨기나무에 임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침 모세가 양떼를 몰고 그곳으로 왔기에 하나님께서 그곳에 있는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것이지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를 보고 모세가 신비하게 여겨 가까이 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 네 발의 신을 벗어라.” 모세, 네가 나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가 바로 토브한 곳이다… 이런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 바울과 실라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앞에 엎드린 곳… 여기가 다 기도하는 곳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내가 그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린 곳, 거기에 귀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곳이 어딘가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로 하여금 능력을 나타내게 하시는 곳, 그 곳이 어디 입니까? 애가 서 기자, 즉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 곳은 예루살렘 성전 산이었습니다.    

애가 서의 시인은 초막절 아침에 성전 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상 대로 성전 산은 초토화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떠난 곳 같았습니다. 성전의 무너진 잔재가 더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더미 위로 잡초가 삐죽삐죽 솟아나 있었습니다. 그 잡초들 가운데 쑥과 독초가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그 쑥과 독초를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눈에 쑥은 약초로, 독초는 향초로 바뀌어 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꾸신 겁니다. 그는 무너진 성전재 위에서, 그리고 그 위에 피어난 쑥과 독초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 즉 ‘토브’의 세계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토브한 세계가, 인간이 만든 성전, 즉 라아의 세계 위에 있었습니다. 시인은 거기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시인은 그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큽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기도하는 곳, 즉 토브의 세계로 가서 얻게 된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다시 암울한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 암울한 과거는 하나의 사건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감옥의 웅덩이에 갇혔던 사건이지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의 포위망을 잠깐 풀었을 때였습니다. 그 틈을 타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빠져나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레미야도 예루살렘을 나와 고향인 아나돗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벤야민 문에서 군인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수문장 아리야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에게 공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똑 같은 입장이었지요. 수문장 아리야는 예레미야에게 바벨론 간첩이란 혐의를 씌우고 감옥으로 이송했고 이후 예레미야는 뚜껑이 있는 웅덩이 속에 갇혀서 여러 날을 보내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드기야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레미야는 왕의 배려로 웅덩이에서 나와 감옥의 지상 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떡 한 개씩 얻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 뜰에서도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떠들어 댔습니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요. 예레미야는 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관리들은 굽힐 줄 모르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외치는 그를 진창이 있는 깊은 구덩이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 구덩이가 얼마나 깊었는지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진창 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빨리 죽으란 말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끈질긴 목숨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죽고 싶을 때 죽지도 못합니다. 시드기야 왕의 내시인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해냈던 것이지요. 이후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시위대는 왕을 경호하는 부대였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왕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을 만나서 또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예레미야는 이 때문에 감옥으로 되돌아 가지는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서 38장 28절에 따르면,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까지 감옥의 뜰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옥의 뜰은 시위대 뜰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가 예레미야에게는 시간이 가장 많았을 때였습니다. 시위대 뜰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장소였던 것이지요. 거기서 예레미야는 따로 할 일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지요. 그러므로 저는 예레미야가 이때 애가 서를 구상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복 당한 사람들은 정복자의 언어를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히브리어를 버리고 바벨론어를 써야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히브리어 문자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예레미야는 히브리어 문자 스물 두 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도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시위대 뜰은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토브’의 세계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에게 시위대 뜰은 삭막한 곳이었고 예레미야 같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곳이었지만, 정작 예레미야에게는 기도의 장소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애가 서가 적어도 구상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애가의 영감을 주셨던 시위대 뜰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던 떨기나무가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려는 다락방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은 차가 없어도 갈 수 있고 교통카드가 없어도 갈 수 있습니다. 물론 보딩패스도 필요하지 않지요.

 

오늘은 성전 산에 올라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예레미야가 울컥한 부분을 다룹니다. 가끔 자기에게 은전을 내려 준 시드기야 왕도 바벨론으로 잡혀 갔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 갔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예레미야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오히려 예레미야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더욱 더 괴로웠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애가 서 3장 40절 부터 66절까지 다룹니다. 꽤 길지요. 그래서 설교 원고에는 히브리어 본문을 적어 두었지만 읽지는 않기로 하겠습니다.

첫 부분, 즉 40절에서 42절까지 석 절은 예레미아 애가 서 3장의 열 네 번째 연이되겠습니다. 그래서 열 네 번째 문자인 ‘눈’이 각 절의 맨 앞에 나옵니다.  

נַחְפְּשָׂ֤ה דְרָכֵ֙ינוּ֙ וְֽנַחְקֹ֔רָה וְנָשׁ֖וּבָה עַד־יְהוָֽה׃

נִשָּׂ֤א לְבָבֵ֙נוּ֙ אֶל־כַּפָּ֔יִם אֶל־אֵ֖ל בַּשָּׁמָֽיִם׃

נַ֤חְנוּ פָשַׁ֙עְנוּ֙ וּמָרִ֔ינוּ אַתָּ֖ה לֹ֥א סָלָֽחְתָּ׃ ס

“우리가 바꿉시다. 우리가 했던 행동을. 그리고 돌아갑시다. 주님께로. 듭시다. 우리의 마음들과 우리의 손들을. 하나님께로. 하늘에 계신.”

성전 산에서 내려온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거리에 서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외쳤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들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몇 사람이나 예레미야의 말에 따랐을까요? 들어야 할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갔거나 전투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잡혀가지 않은 별 볼 일 없는 땅의 사람들, 즉 암 하 아레쯔는 말귀를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바벨론 정복자들과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거리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예레미야의 외침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지요. 망국의 선지자에게 남은 것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큰 아쉬움과 막대한 슬픔 뿐이었습니다.  

43절에서 45절까지 열 다섯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열 다섯 번째 문자인 싸멕이 각 절 맨 앞에 나옵니다.

סַכֹּ֤תָה בָאַף֙ וַֽתִּרְדְּפֵ֔נוּ הָרַ֖גְתָּ לֹ֥א חָמָֽלְתָּ׃

סַכּ֤וֹתָה בֶֽעָנָן֙ לָ֔ךְ מֵעֲב֖וֹר תְּפִלָּֽה׃

סְחִ֧י וּמָא֛וֹס תְּשִׂימֵ֖נוּ בְּקֶ֥רֶב הָעַמִּֽים׃ ס

덮으셨습니다. 진노를. 그리고 우리를 따라오셨습니다. 우리를 잡으시고 죽이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지요. 덮으셨습니다. 구름으로. 당신을. 뛰어 넘으셨습니다. 기도를. 쓰레기와 폐품으로 놓으셨습니다. 많은 나라 사람들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보기에 예루살렘은 온통 하나님의 진노로 코팅이 되어진 것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뒤를 따라 오셔서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기도를 듣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쓰레기와 폐품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많은 나라 사람들이 제멋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쓰레기로 취급하고 폐품으로 알아 그대로 처리할 것입니다.

 

46절에서 48절까지 열 여섯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열 여섯 번째 문자인 페가 각 절 맨 앞에 나옵니다.

פָּצ֥וּ עָלֵ֛ינוּ פִּיהֶ֖ם כָּל־אֹיְבֵֽינוּ׃

פַּ֧חַד וָפַ֛חַת הָ֥יָה לָ֖נוּ הַשֵּׁ֥את וְהַשָּֽׁבֶר׃

פַּלְגֵי־מַ֙יִם֙ תֵּרַ֣ד עֵינִ֔י עַל־שֶׁ֖בֶר בַּת־עַמִּֽי׃ ס

벌렸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그들의 입을.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두려움과 함정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파멸과 멸망도. 강물처럼 흘러내립니다. 내 눈에서. 딸 내 백성의 파멸 때문에…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입을 벌려서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입으로 삼키려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두렵습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강처럼 흐릅니다. 내 어여쁜 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파멸을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가정이 파괴되었고, 그의 친지들과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의 가정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들을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습니까? 나의 아름다운 삶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49절에서 51절까지 열 일곱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열 일곱 번째 문자인 ‘아인’이 각 절 맨 앞에 나옵니다.

עֵינִ֧י נִגְּרָ֛ה וְלֹ֥א תִדְמֶ֖ה מֵאֵ֥ין הֲפֻגֽוֹת׃

עַד־יַשְׁקִ֣יף וְיֵ֔רֶא יְהוָ֖ה מִשָּׁמָֽיִם׃

עֵינִי֙ עֽוֹלְלָ֣ה לְנַפְשִׁ֔י מִכֹּ֖ל בְּנ֥וֹת עִירִֽי׃ ס

내 눈의 눈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쉬지 않습니다. 주님이 살피시고 보실 때까지 입니다. 하늘에서… 내 눈이 상합니다. 나의 네페쉬 때문에… 나의 성읍의 여자들을 보고… 사냥합니다. 새 처럼. 내 원수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예레미야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나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펴 보실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울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이 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영혼 자체가 눈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는가 봅니다. 울 수 있다는 것은 그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이 예루살렘의 여자들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불쌍한 게 아이들과 여자들이지요. 아이들은 죽음을 당하고 여자들은 강탈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로 태어난 예레미야는 이 비참한 광경에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52절에서 54절까지 열 여덟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열 여덟 번째 문자인 차데가 각 절 맨 앞에 나옵니다.

צ֥וֹד צָד֛וּנִי כַּצִּפּ֖וֹר אֹיְבַ֥י חִנָּֽם׃

צָֽמְת֤וּ בַבּוֹר֙ חַיָּ֔י וַיַּדּוּ־אֶ֖בֶן בִּֽי׃

צָֽפוּ־מַ֥יִם עַל־רֹאשִׁ֖י אָמַ֥רְתִּי נִגְזָֽרְתִּי׃ ס

자릅니다. 웅덩이 안에서. 내 생명을. 던집니다. 돌을. 내게.  넘칩니다. 물이. 내 머리 위에. 내가 내게 말합니다. 나는 망했노라.

예레미야의 뇌리에 비참하고 암울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감옥에서 두 번이나 웅덩이에 갇힌 사건이었습니다. 웅덩이에 들어간 것은 마치 생명을 칼로 자르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돌을 던지는 것 같았습니다. 구덩이 바닥에는 진흙탕이 있었습니다. 진흙탕 속에서 살이 부어올랐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물이 머리 위로 넘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죽는가 보다… 이렇게 죽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55절에서 57절까지 열 아홉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열 아홉 번째 문자인 ‘코프’가 각 절 맨 앞에 나옵니다.

קָרָ֤אתִי שִׁמְךָ֙ יְהוָ֔ה מִבּ֖וֹר תַּחְתִּיּֽוֹת׃

קוֹלִ֖י שָׁמָ֑עְתָּ אַל־תַּעְלֵ֧ם אָזְנְךָ֛ לְרַוְחָתִ֖י לְשַׁוְעָתִֽי׃

קָרַ֙בְתָּ֙ בְּי֣וֹם אֶקְרָאֶ֔ךָּ אָמַ֖רְתָּ אַל־תִּירָֽא׃ ס

 

내가 불렀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주님. 웅덩이에서. 낮고 낮은… 내 음성을 들으셨으니 당신의 귀를 가리지 마십시오. 나의 부르짖음과 울음에… 부르짖은 그 날에. 당신께 아뢴 그날에. 겁 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예레미야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 여러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기도의 장소가 되겠습니다. 토브의 장소가 된단 말이지요. 웅덩이는 예레미야에게 있어 기도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겁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예레미야는 능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58절에서 60절까지 스무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스무 번째 문자인 ‘레쉬’가 각 절 맨 앞에 나옵니다.

רַ֧בְתָּ אֲדֹנָ֛י רִיבֵ֥י נַפְשִׁ֖י גָּאַ֥לְתָּ חַיָּֽי׃

רָאִ֤יתָה יְהוָה֙ עַוָּ֣תָתִ֔י שָׁפְטָ֖ה מִשְׁפָּטִֽי׃

רָאִ֙יתָה֙ כָּל־נִקְמָתָ֔ם כָּל־מַחְשְׁבֹתָ֖ם לִֽי׃ ס

풀어주셨습니다. 내 마음의 원통함을. 주님. 내 생명을 구원하시고 살게 하셨습니다. 보셨습니다. 주님. 내가 꼬인 것을. 당신의 법으로 판단하소서. 보셨습니다. 모든 보복을. 모든 사악함을. 내게 대해.

하나님의 응답은 곧 능력입니다. 이제 예레미야의 마음에 있던 원통함이 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구원하셨고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억울한 사정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라아의 세계에서 인간의 정략으로 꼬여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으로 직접 보셨습니다. 그리고 보복적이고 사악한 인간의 행사를 개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법으로 판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겁니다.

 

61절에서 63절까지 스물 한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스물 한 번째 문자인 ‘쉰’이 각 절 맨 앞에 나옵니다.

שָׁמַ֤עְתָּ חֶרְפָּתָם֙ יְהוָ֔ה כָּל־מַחְשְׁבֹתָ֖ם עָלָֽי׃

שִׂפְתֵ֤י קָמַי֙ וְהֶגְיוֹנָ֔ם עָלַ֖י כָּל־הַיּֽוֹם׃

שִׁבְתָּ֤ם וְקִֽימָתָם֙ הַבִּ֔יטָה אֲנִ֖י מַנְגִּינָתָֽם׃ ס

들으소서 그들이 비방하는 것을. 주님. 나에 대한 모함을. 일어나 나를 비방하는 그들의 입술을. 모방하는 소리를. 항상 하루 종일 그렇게 하는 것을… 주목 하소서. 앉고 설 때 나는 그들의 노래가 됩니다.

사람의 입이 왜 그리 간사한지 모릅니다. 영혼 없는 말이 독 화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빨리 날아 가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사람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나를 모함하고 비방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이 나를 하루 종일 그렇게 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앉으나 서나 내게 욕을 해댑니다.

 

64절에서 66절까지 스물 두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스물 두 번째 문자인 ‘타브’가 각 절 맨 앞에 나옵니다. 애가 서 3장의 마지막 연입니다.

תָּשִׁ֨יב לָהֶ֥ם גְּמ֛וּל יְהוָ֖ה כְּמַעֲשֵׂ֥ה יְדֵיהֶֽם׃

תִּתֵּ֤ן לָהֶם֙ מְגִנַּת־לֵ֔ב תַּאֲלָֽתְךָ֖ לָהֶֽם׃

תִּרְדֹּ֤ף בְּאַף֙ וְתַשְׁמִידֵ֔ם מִתַּ֖חַת שְׁמֵ֥י יְהוָֽה׃ פ

“돌아서서, 그들에게, 댓가를 주소서, 주님.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가려진 마음을 주시고 그들을 저주 하소서. 진노로 그들의 뒤를 쫓으시고 멸하십시오 주님의 하늘 아래서…  

결국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요청 합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복수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그들의 손이 행한대로 그 댓가를 주시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로 그들을 따라 가시고 그들을 멸하실 겁니다. 주님이 계신 그 하늘 아래서… 예레미야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예상 되었지만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도록 주마가편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겁니다. 귀신 들린 아이 하나 반듯하게 돌려 놓지 못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아이로 부터 귀신을 나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말 못 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나가면서 그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기절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가 죽었다면서 방정맞은 입을 놀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고 그 아이는 일어나 두 발로 섰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방정맞은 입을 믿을 것도 아니고 그것을 다수의 여론이라 볼 것도 아닙니다. 아울러 우리는 아이를 어디서든지 잡아 거꾸러뜨리고 거품을 흘리게 하고 이를 갈고 파리하게 만드는 더러운 귀신을 두려워 할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는 장소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장소 말이지요.

제가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유대인의 신비주의라 하는 카발리즘은 바벨론의 점성술에서 왔다고 합니다. 점성술이란 일월성신의 움직임을 알아내서 실생활에 이용한 것이지요. 가뭄과 홍수를 예측하고 농사의 시기를 결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보다 안정화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또한 패주, 즉 패권을 차지한 주인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패권을 차지하려면 이 정도의 안정화는 추구해 주어야지요. 동양에서는 이 방면의 책을 주역이라 합니다. 주역을 알면 패주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카발리즘이나 점성술이나 주역은 이해하기가 참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가져와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명리학이라 부릅니다. 그래도 명리학은 글로 적힌 것이므로 무슨 주장인지 우리가 살펴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런 것들을 다 부정하고 귀신과 직접 대화를 해서 길흉화복을 점쳐 준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반도에 청동기 시대 이래로 자리를 잡고 있는 무당과 박수입니다. 이들에 의해 이 땅에 무속신앙이 자리를 잡았지요. 그런데 요즘 무속신앙이 신교란 이름으로 단합하여 정치세력화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교는 귀신 신 자를 씁니다. 이들은 지금 특정인을 대통령 후보로 밀고 있지요. 문제는 많은 목사들이 이들과 한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금 많은 교회에서 제2의 신사참배가 행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는데, 남은 자들은 무당과 한편이 되라는 목사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가 공산화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일부 대형교회에서 있는 일이긴 합니다. 참 어려운 시절이 되고 있습니다. 오미크론 때문에 하루 5만 명의 확진자가 나올 수도 있다는데 이제는 스텔스 변종까지 나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음성 판정을 받아도 그게 음성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애가 서 3장을 끝냅니다. 그런데 4장과 5장의 내용은 1장과 2장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번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부터 신명기 묵상을 시작하겠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제 40년 쉐밭 월 1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토라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이 강의는 그 다음 달인 아달 월 6일에 끝났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느보 산에 올라가 죽고 말았습니다. 신명기는 한 달 하고 6일만에 쓰여진 책이라 하지요.  

오늘은 쉐밭 월 28일로 이틀 후에는 아달 월이 시작됩니다. 쉐밭 월이 다 지나갔는데 새삼스럽게 웬 신명기랴… 그런데 히브리력으로 금년은 윤년이라 아달 월이 두 번 있습니다. 2월 1일 부터 아달1 월이 시작되고, 3월 3일 부터 아달2 월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4월 1일에 드디어 니싼 월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4월 15일 일몰에 드디어 유월절이 시작되지요. 이번에는 우리가 페싹 세데르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규모를 작게 해서라도 갖고 싶습니다.

아무튼 지금이 신명기를 다루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우리는 작년 8월까지 민수기를 다룬 후에 곧장 예레미야의 신탁을 다루기 시작했지요. 이게 오늘 예레미야 애가 3장까지 진행 되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많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명기를 다루면서 작년 말까지 진행한 레위기 공부를 복습하며 아이들을 위한 토라 공부 교재를 완성 시켜 볼까 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1) 어째서 애가 서 3장 40절 이하의 내용이 우울하게 변했나요?

2) 예레미야가 애가 서를 썼다면 히브리어 22문자를 사용한 이유는?

3) 예레미야는 낙관적인 선지자였나요? 그 이유는? 아니라면, 또 그 이유는?

 

 

 

 

2022년 1월 23일

 

예레미야 애가  3장 19-39: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 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누가복음 6장 27-31절: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토브와 라아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이 나온 이후 영적이란 말이 유행했다. 그런데 영은 히브리어 ‘네페쉬’를 헬라어 ‘프뉴마’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로 중역할 때 채택된 말이다. 그런데 ‘네페쉬’는 육체와 불가분의 관계로 우리말로 표현하려면 ‘전인적’이라고 해야 헷갈리지 않는다. 그리고 신약의 영적이란 말은 프뉴마로 가지도 않고 오히려 ‘로기코스’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은 합리적, 이성적이라고 번역해야 헷갈리지 않는다. 따라서 영이란 말을 육체와 분리되어 인간 위에 떠도는 어떤 무형의 매체로 이해하고 그것을 종교화 시키면 안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프뉴마, 프뉴마티는 네페쉬와 관련해 해석해야 한다.

가끔 영적 체험을 제대로 하자!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바로 그 영적 체험 때문에 사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본다. 심지어 그들의 생각과 말이 무속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티비에 나오는 일부 부흥사들의 설교 아닌 설교… 그게 굿판의 무당 소리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자극적인 말만 주문처럼 되풀이 하고…

애 3.38에 따르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 부터 나오지 않느냐고 했다. “미피 엘르욘 로 테체아 하라오트 브하토브.” 여기서 애가 서 기자는 ‘토브’와 ‘라아’를 말한다. 토브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고 라아는 인간의 속성을 말한다. 그래서 라아를 복수형으로 처리한 것 같다. 따라서 라아를 ‘사악함’으로 번역하기 보다 제한적, 한계적으로 번역하고 토브를 ‘좋음’으로 번역하기 보다 무제한적, 전능함으로 번역하는 게 옳다. 우리 말은 라아를 화로 토브를 복으로 번역했는데 뭔 말인지 헷갈린다.  

토브와 라아는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라 섞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의 본 뜻이다. 거룩하려 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죄를 범하게 되고 그 때문에 벌을 받게 된다. 이런 이유로 시인은 감옥에 갇힌 자들 조차 사람으로 대하고 억압하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애초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송사를 억울하지 말아야 한다. 이게 영적인 것이고 토브로 향하는 것이다.

일월성신이 돌아가듯 세상도 돌아가고 그때마다 음양과 함께 길흉화복도 생기니 그 변화 속에서 길하고 복 쪽으로 가야 인생의 목적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느냐… 인생의 목적이란 게 또 무엇이냐… 오복을 누리는 거 아니겠어? 따라서 현세구복적 기도는 필수지… 하지만 하나님은 일월성신 위에 계시고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따라서 짧은 혀로 사람을 속이는 자는 목사라도 사기꾼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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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토브와 인간의 라아는 섞이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 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피조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결코 헷갈리면 안됩니다. 우리 자신이 뭔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영어 격언을 하나 실어 놓았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시간을 맞추신다. 이르지도 않게 하시고 늦게도 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가 좀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게 기다림의 가치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우리는 수퍼 맨을 찾을 수 밖에 없고, 영매를 찾을 수 밖에 없고, 무당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우리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기다림이 수포로 돌아갈까 염려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믿음과 기다림에 있어 효과적인 방법 하나를 개발해 냈습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토브’를 선택하고, 인간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라아’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 토브와 라아가 결코 섞일 수 없게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토브를 우리는 ‘좋음’으로만 번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나타내는 ‘라아’를 나쁨으로만 번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토브와 라아로 하나님과 인간, 더 나아가서 창조주와 피조물을 대비 시킵니다. 이런 노력은 후대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토브와 라아의 차이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설교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애가 서 3장 19절 부터 39절까지를 본문으로 다루겠습니다. 모두 스물 한 절이 되니까, 3절씩 한 연을 묶으면, 오늘의 본문은 일곱 연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연이 되는, 3장 19절 부터 21절까지의 석 절은, 3장 전체로 보면 일곱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문자인 자인이 각 절의 맨 앞에 사용이 되었습니다.

“즈카르-아느이이 부-므-루디 라-아나 바 로아쉬” 나의 결핍을 기억하며 나의 고단함을 기억합니다. 쑥을 보면서, 그리고 독초를 보면서… “자코르 티즈코르 브-타쉬이아흐 브-타쇼아흐 알라이 나프쉬” 나의 고난을 기억했으며 또한 기억합니다. 내 영혼이 엎어졌었고 또한 엎어져 있다는 것을… “조트 아쉬브 엘-리삐 알-켄 오ㅋ힐” 이것을 내가 내 앞에 두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이게 희망이 됩니다. 20절에서 제가 직역한 “이것을 내가 다시 생각해 보니…”는 개정개역에서는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로 번역을 했고, 개역에서는 “중심에 회상한즉…”이라고 번역 했습니다. 한글 번역본들은 이 대목을 조금씩 의역을 해두었습니다.   

애가 서 1장 부터 3장 18절까지… 다시 살펴 보면, 시인은 주전 586년 아브 월 9일의 성전 파괴 사건을 보고 패닉에 빠졌습니다. 엄청난 우울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나오는 말이 원망이었고 저주였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에는 하나님께 대한 섭섭함이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브 월을 보냈고, 엘룰 월을 보냈고, 티슈리 월을 맞았습니다. 티슈리 월 10일은 속죄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전이 없어져서 속죄가 불가능했습니다. 여러분, 속죄가 불가능하다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십니까?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슬픔은 행복 할 수 없다는 슬픔보다 훨씬 더 큽니다. 욤 키푸르가 지나고 초막절이 다가왔습니다. 무너진 성전 산에도 초막절은 오는가…   

애가의 시인은 초막절을 맞았습니다. 아마 반 세겔짜리 동전 하나를 챙겼을 겁니다. 그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아침 일찍 성전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시인은 참 어렵게 성전 산을 올라왔습니다. 왜냐하면 올라오는 계단이 모조리 다 부셔졌기 때문입니다. 겨우 성전 산에 올라와 보니 성전 뜰에는 큰 돌무덤이 여러 개가 생겨나 있었습니다. 모두 성전이 파괴된 흔적이었습니다. 하얗게 빛났던 그 장엄한 대리석들이 불에 타서 시커멓게 변했고 그게 다 깨어져서 날카로운 자갈이 되어 지상에 깔려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자갈들 사이로 잡초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의 잔재들 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잡초들… 그것은 쑥이었고 또한 독초였습니다. 쑥과 독초를 보는 순간, 시인의 마음은 심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이 계시던 성전이, 우리가 기도하던 집이, 이렇게 형체도 없이 무너지고 말았는가… 그 거룩한 성전에도 다른 곳과 다름이 없이 잡초는 솟아나고 쑥과 독초는 피어나는가… 시인은 입 안이 쓰디 쓰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마음까지 독기가 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독기는 모든 것을 마비시킬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심연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내가 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결과가 결국 이 쑥과 독초란 말인가… 나는 피골이 상접했고 쓰러질 듯 휘청거린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쑥과 독초 뿐… 아, 나는 어디에서 쉼을 얻을 수 있을까…

초막절을 기억하고, 반 세겔 짜리 동전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어렵게 성전 산에 올라온 그였습니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절망이었습니다. 그때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로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무너진 성전 위로 아무 손상이 없는 태양이 솟더니 여전히 밝은 빛으로 땅을 비추었습니다. 그 밝은 빛은 돌 무더기 사이에서 피어난 쑥과 독초를 또한 비추었습니다. 그때 시인의 절망스러운 눈을 어떤 힘이 나타나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의 눈이 쑥과 독초에 맞추어 졌습니다. 시인은 자기 눈으로 보았습니다. 쑥에서 돋아난 무수한 하얀 솜털을… 또한 독초의 잎에서 피아난 아름다운 자주 색 꽃을 보았습니다. 그 영롱한 자줏빛… 그 순간, 시인의 머리에서, 쑥의 쓴 맛은 사라져 버리고, 약초의 지눅한 냄새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쑥은 구원의 약초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마비시킬 것 같았던 독초는 오히려 생기를 북돋워 주는 허브로 보였습니다. 그것은 라벤더였습니다. 또는 로즈마리나 페파민트였던 것입니다.

애가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풀들은 성전과 관계 없이 여전히 아름다운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것들이 성전의 잔재 위로 피어 올랐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은 무너졌지만, 그 무너진 성전 위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쑥과 라벤더가 솟아올랐다… 갑자기 시인은 흥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 속에서 마치 뭉개구름처럼 희망이 뭉글뭉글 솟아올랐습니다. 희망이 솟아오르는 순간, 시인의 눈에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이 무너졌으므로 세상이 끝났노라…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무너져 있었던 것은 인간의 ‘라아’였습니다. 하나님의 ‘토브’는 무너진 적이 없었습니다.

시인이 이것을 깨닫게 되자 그 마음 속에 여유가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입니다. 본문에서 우리 말 희망으로 번역된 단어는 본디 ‘야ㅋ할’ 입니다. 기다릴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을 히브리어로 “알-켄 오ㅋ힐”이라고 표현 합니다. 이 표현을 직역하면 ‘기다림에 대해서 예스! 한다.’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림에 대해 긍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환자는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는 그 자체가 희망이 되는 겁니다. 치유를 받아야 건강한 사람이 되고,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라아’한 인간이 ‘토브’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시인은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읊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외우고 있는 시입니다. 애가서  3장 22-24절의 시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ㅋ하쓰데이 아도나이 키 로—타므누 키 로-칼루 라ㅋ하마이브.” “ㅋ하다쉼 라쁘카림 라빠 엘무타테카.” “ㅋ헬르키 아도나이 아므라 나프쉬 알-켄 오ㅋ힐 로.”

대략 직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끝나지 않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품어주시기 때문에… 이게 새롭습니다. 아침마다… 당신의 아멘이 큽니다. 내 몫이 주님이십니다. 내가 나의 전인격적으로 말하기를… 그러므로 나는 그를 기다리는 것에 예스! 입니다.”

시인은 성전 뜰에 피어난 쑥과 독초를 보고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 쑥이 약초가 되고 그 독초가 허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쑥과 독초로 간단히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인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내 몫이 되신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몫이 되시니, 내 몫이 되신 하나님은 누가 빼앗아 가겠습니까? 그래서 내 몫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보다 더 큰 희망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 뜰에서 하찮은 쑥과 독초를 보고 시인은 영원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희망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희망을 갖게 된 시인은 이제 성전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성전 산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병원 시설이 좋아도 환자가 아닌데 병원에 계속 머물 필요가 없겠지요. 성전 산에서 내려온 시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희망을 가지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날 아침, 시인은 변했습니다. 광인 처럼 절망에 빠져 소리만 지르던 그가 초막절 아침에 희망을 갖게 되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제 예언자로 또한 선지자로 회복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와서 그를 괴롭혀도 그는 결코 괴로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또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아홉 번째 연으로 들어갑니다. 25절 부터 27절까지입니다. 각 절의 첫 번째 문자로 히브리어의 아홉 번째 문자인 테트를 사용합니다. 테트라서 테트로 시작하는 토브란 말을 채택합니다. 그래서 석 절 모두 토브로 시작합니다. 토브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형용사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토브 아도나이 르-코바 르-네페쉬 티드르쉐누.” 주님은 좋으십니다. 기다리고 찾는 사람들에게… “토브 브-야ㅋ힐 브-두맘 리트슈아트 아도나이.” 좋습니다. 조용히 기다리는 게, 하나님의 구원을… “토브 라 께베르 키 이싸아 올 삐느우라이브.” 좋습니다. 젊은 자는 누구나 짐을 지는 것이…

거듭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께 합당한 형용사를 선택하라고 하면 ‘토브’ 밖에 없습니다. 이 말 이외에 하나님께 어울리는 형용사를 찾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사용하는 형용사는 ‘라아’ 입니다. 라아는 토브와 반대되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 대로 창조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과 다른 존재이십니다. 이걸 한 문장으로 나타내면, 하나님은 토브 하신 존재시고, 인간은 라아 한 존재다… 입니다. 하나님은 라아한 인간들이 찾고 기다리면 토브 하신 존재로 그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애가 서 시인의 경우에는 쑥과 독초를 빛내는 햇빛을 통해 나타나셨지요.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가리켜 우리는 구도자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Seeker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도자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요? 토브 하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았다면, 그 하나님께서 구도자를 위해 당신의 뜻을 이루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구도자 였던 애가의 시인은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단계 올라선 것이지요.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게 되었고 아울러 자신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도 기다리기가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거나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앞당기려고 하지요. 그래서 자청하여 짐을 지기도 합니다. 목숨이 위험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들고 민족 해방 전선에 뛰어들고 독립 운동을 벌입니다. 하지만 애가의 시인은 젊은 자들이 구태여 자청을 해서 그런 짐을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오로지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주신 젊음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에는 배워야 할 게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젊은 시절에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바로 다음 절에 젊은이가 배워야 할 것이 나옵니다.

 

열 번째 연으로 들어 갑니다. 28절 부터 30절까지 입니다. 열 번째 문자인 요드가 각 절의 첫 번째 글자로 사용 되었습니다. “여-쉐브 빠-다드 브-이똠 키 나탈 알라이브.”  따로 앉아서 기다리십시오. 왜냐하면 그가 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텐 뻬아파르 피후 울라이 예슈 키크바.” 티끌에게 입을 주시오. 어쩌면 그게 희망일게요. “이텐 르-마케후 레-ㅋ히 이쓰빠야 쁘-ㅋ헤르파.” 주시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채우시오 치욕을…

시인은 어렵고 힘든 일을 스스로 취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괜히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자기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해 보니, 하나님은, 적어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공짜로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니 일을 맡기시고 그것으로 구원을 이루시더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줍잖게 나서지 말고, 차라리 홀로 앉아서 때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만약 때를 기다리는 것이 답답하다면, 차라리 땅 바닥에다 입을 맞추라고 했습니다. 그게 희망일지도 모르니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성을 갖추려면 치욕을 견뎌내야 합니다. 경험이 없거나 혈기가 많은 사람들은 땅 바닥에 입을 맞추는 영성을 갖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뺨을 때리면, 나는 다른 뺨을 돌려 대면서 때리라고 해야 합니다. 그게 행복이지요. 때리는 게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시인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치욕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의 시간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영성이란 말이지요.

이 말씀을 행동으로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루마니아 출신의 콘스탄티누스 게오르규라 하는 정교회 신부입니다. 그는 신부가 되기 전에 ‘25시’라는 제목으로 장편 소설을 썼습니다. 그는 2차 대전 때 미군에게 잡혀 포로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쓴 소설이 바로 ‘25시’라는 제목의 소설입니다. 25시… 하루는 24시로 끝나기 때문에 25시는 존재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그는 24시가 지나 하루가 끝났지만 그 다음 날 아침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욕과 고통이란 이름으로 시간은 계속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게오르규는 ‘25시’란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분이 한국을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1974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한 후, 1992년 6월에 돌아가실 때까지, 자그마치 다섯 번이나 우리 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그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온 후 꿇어 엎드려서 김포공항 시멘트 바닥에다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 물어봤지요. 그의 대답이 바로 애가 서 3장 29절이었습니다. 한국의 희망이 이루어 지도록 땅에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3장 30절을 보니,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네요. 마태복음 5장 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누가복음 6장 29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게오로규 처럼 애가 서의 말씀을 그대로 채택하시고 실천하며 사셨군요.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은 우리가 따르기 힘든 권면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애가의 시인이 가졌던 영성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도 이 어려운 말씀들을 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구원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지요.            

열 한 번째 연으로 들어 갑니다. 31절 부터 33절까지 입니다. 열 한 번째 문자인 카프를 각 절의 첫 번째 글자로 사용합니다. “키 로 이즈나아흐 르-올람 아도나이.”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므로… “키 임-호가 브-리아ㅋ함 크-로브 ㅋ하쓰또 ㅋ하쓰다이브.”  왜냐하면 슬픔을 주신다 해도 그 풍성한 인자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감싸주시니… “키 로 인나 밀리뽀 바야께 쁘네이-이쉬.”  억압이 그 분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후손이 고통 당하는 것도 그 분은 원치 않으신다…  

애가의 시인은 다시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할 것입니다. 슬픔을 당해도 그 슬픔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잠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풍성한 인자하심은 그 슬픔조차 녹여 없애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슬픔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본래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열 두 번째 연으로 들어 갑니다. 34절 부터 36절까지 입니다. 열 두 번째 문자인 라메드를 각 절의 첫 번째 글자로 사용합니다. “르-다케아 타ㅋ하트 라그라이브 콜 아시레이 아레쯔.” 아래 사람을 발로 밟지 말라. 땅의 모든 수인들 조차도… “르-하토트 미슈파타-까베르 네게드 프네이 엘르욘.” 사람의 법을 굽게 하지 말라.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르-아부에트 아담 쁘리이보 아도나이 로 라아.” 사람의 다툼을 굽게 하는 것을 하나님은 보지 않으신다.

시인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치욕도 견딜 수 있게 되었고, 고통도 견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공의가 생각니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토브의 세계에서는 구원을 생각하면 곧장 공의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나온 영화로 아바타가 있습니다. 아바타는 산스크리트 어로 하늘에서 내려온 자란 뜻이라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바타라’입니다. 이 영화에 이런 심상치 않은 대사가 등장합니다. 행성 판도라의 원주민인 나비족의 공주인 네이티리가 아바타인 제이크에게 한 말이지요. “에이와는 편을 들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에이와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에이와는 여신인데 여호와와 비슷한 발음이지요. 이 대사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과 함께 반드시 공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희망과 공의는 함께 간다는 것을 수긍하게 됩니다. 애가의 시인은 비록 제 잘못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의미겠지요. 이게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서로 싸울 때 일방을 거들지 말라고 합니다. 한쪽 편 사람만 응원을 해서 상대 편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말씀을 재판을 왜곡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권력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대한민국의 일부 판사들이나 검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반드시 도태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열 세 번째 연으로 들어 갑니다. 37절 부터 39절까지 입니다. 열 세 번째 문자인 멤을 각 절의 첫 번째 글자로 사용합니다. “미 제 아마르 바테히 아도나이 로 치브아흐.” 어디서 이 말이  나왔으랴 주님이 명령하지 않으셨다면…“미피 엘르욘 로 테체아 하라요트 브하토브.”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가? 라아와 토브가… “마-이트오넨 아담 ㅋ하이 께베르 알-ㅎ케트오 ㅋ하타아이브.” 무엇을 원망하는가? 생명이 있는 사람아 너는 네 죄로 벌을 받거늘…

다시 반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망과 공의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희망과 공의는 결국 하나님의 ‘토브’에 속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희망과 공의입니다. 희망만 있어도 토브가 아니고 공의만 있어도 토브가 아닙니다. 희망과 공의가 함께 있어야 토브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치우치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기 때문에 그 자체로 토브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고 제한적이라서 구원이 필요한 존재 입니다. 그래서 라아합니다. 이 대목의 한글 본문은 라아한 인간의 것을 ‘화’라고 하고 토브한 하나님의 것을 ‘복’이라고 번역 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대목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통과 치욕을 견딜 수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찾고 구원을 기다리는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애가의 시인은 그 초막절 아침에 성전 산 돌무더기 앞에서 쑥과 독초를 통해 이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알게 되자 쑥과 독초는 시인에게 약초와 허브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치료를 받고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의 백성을 향해 올바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제대로 인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밝은 태양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름답고 영적으로 영양이 있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0절 부터 시인이 그의 백성에게 했던 아름답고 영양가 있는 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40절 부터 66절까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27절을 모두 다루기가 어렵겠지요. 그러고 보니 예레미야 애가 서 3장이 재미있습니다. 모두 66절입니다. 성경이 66권이지요. 오늘까지 우리는 39절까지 살펴 보았습니다. 구약이 39권이지요. 앞으로 우리는 27절을 더 살펴 볼 것입니다. 신약이 27권이지요. 그렇다구요.

 

1) 토브와 라아의 차이를 구분해 봅시다.

2) 무너진 성전의 잔재에 피어난 쑥과 독초가 '토브'한 이유는?

3) 희망을 가진 사람이 고통과 치욕을 참을 수 있는 이유는?

 

 

 

 

2022년 1월 16일

 

예레미야 애가  3장 1-18절: [01]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02]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03]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0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 [05]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06]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07]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0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0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10]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12]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15]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17]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 버렸음이여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소망이 끊어졌도다 하였도다.

요한복음 21장 3-7절: [0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04]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0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0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더라 [0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예레미아 애가 3장

 

애가 서 3장은 모두 66절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스물 두 문자가 그 순서대로 3절씩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절 부터 3절까지는 각 절의 첫 단어가 첫 번째 문자인 알렢으로 시작합니다. 4절 부터 6절까지는 각 절의 첫 단어가 두 번째 글자인 베트로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문자의 순서대로 3절씩 한 묶음이 되어 전개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64절 부터 66절까지의 경우는 22번째 연이 되어 각 절의 첫 단어가 스물 두 번째 문자이며 마지막 문자인 타브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애가 서 3장의 외형율입니다.

그런데 애가 서 3장 각 절의 싯귀는 다른 장들의 각 절의 싯귀에 비해 그 길이가 짧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내용이 비교적 명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넋이 나간 사람의 넋두리 같은 시가 정신을 차린 사람의 정제된 시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애가 서 1장과 2장을 읽어 보십시오. 트라우마를 경험한, 또는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의 정신 없는 넋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3장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애가의 시인이 이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참 다행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부터 애가의 시인이 읊어대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1-2장의 퍼붓는 듯한 언사가 줄어들고 이성이 살아난 듯 정제된 언어가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불현듯 생각이 나는 것은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입니다. 즉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를 목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애가 서 3장을 1-18절, 19-39절, 40-66절로 나누어 매 주일 한 부분씩 묵상합니다. 1-18절은 시인(선지자)이 패닉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현실의 괴로움을 토로하다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지요. 깨지고 빼앗긴 성전 터에서 여전히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봐온 그 익숙한 모습…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내 생각 밖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내가 몰랐던 세계… 시인이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죽는 자 이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가 갈 길을 훼방 놓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은 오로지 피해의식일 수 있었지요. 그건 망상이었습니다. 우리가 빨리 벗어나야 할 정신병이었지요. 하나님의 세계는 땅 바닥의 갈라진 틈 사이로 열리고 있었습니다. 쓰디 쓴 고통 이외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영원한 기쁨의 세계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이 기쁨을 어찌 해리 포터가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열차를 타고 호그와트의 마법학교로 가는 것에 비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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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끝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갈릴리에 와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버나움에 와 있었겠지요. 베드로가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예수님과 자기의 몫으로 1세겔 성전세를 냈던 곳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로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3년 동안 겪어 봤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가 과연 살아 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가버나움에 와 있긴 했지만 제자들은 의미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과거에 두 번 봤던 예수님의 모습은 집단 환상일 수도 있으니까요. 답답하고 무료했던 베드로는 물고기나 잡겠다면서 갈릴리 호수로 나갔습니다. 요한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갈릴리 호수에서 업으로 물고기를 잡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밤에 갈릴리 호수로 나갔습니다. 물고기를 잡기에는 밤이 낮보다 유리해서 그랬는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기 위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열심히 그물을 드리웠고 또한 거두어 올렸습니다. 하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슴프레한 새벽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들아, 물고기가 없지?”  이 말의 헬라어 원어는 “파이디아, 메 티 프로스파기온 엑쎄테?”입니다. 파이디아는 어린이, 꼬마란 의미를 가진 파이디온란 단어의 복수형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에게 선생이 얘들아, 꼬마들아… 이렇게 불렀나 봅니다. 파이디아 다음에 나오는 메 티의 메는 부정 의문문이고 티는 부정 의문에 관련한 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프로스파기온은 물고기란 뜻으로 익두스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얘들아, 물고기가 하나도 없지?”라는 부정 의문문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말 성경에는 이 말씀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무슨 이유로 “물고기가 없지?”라는 부정문이 “고기가 있느냐?”라는 긍정문으로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문장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부족한 번역이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얘들아, 물고기가 없지?”란  부정의문문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좀 더 약을 올리시는 그런 의미로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아울러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제자들을 지켜 보셨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우리는 물고기나 잡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잠도 못자고 밤새도록 공허한 손을 놀릴 때 예수님은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아침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물고기 잡이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져 보라…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해봤더니 잡힌 물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순간, 요한이 음성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두른 채 호수 안으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어떤 예의를 차리고 싶었나 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선생님… 그는 예사 인간이 아닌 겁니다. 그리고 자기는 명색이 수제자였습니다. 겉옷을 두른채 호수로 뛰어내렸으니 겉옷을 입으나마나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예의를 차리지 않은 게 되고 말았네요. 하지만 베드로는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호숫가에 계시는 예수님을 향해 열심히 헤엄쳐 갔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있던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배를 저어 왔습니다.

그들이 머물렀던 가버나움은 절망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일단 가버나움 자체가 유대왕국의 변방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쪽 가까이 있는 요단강을 건너면 이방의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벳새다로 알고 있는데요, 이곳에서는 오래 전 부터 이민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요르단과 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군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돼지들을 많이 키웠지요. 만약 일이 잘못되면 제자들은 헤롯 왕에게 쫓겨 벳새다로 가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미션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유대인들에게 있어 아브 월 9일은 가장 절망스러운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파괴되었는데 이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때는 날씨조차 가장 절망스러울 때입니다. 올해 아브 월 9일은 8월 6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칠말팔초… 가장 더운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이 때는 가장 더운 때입니다. 한반도 보다 훨씬 더 덥다고 할 수 있지요. 유대 광야에 있는 바위에다 계란을 깨서 올리면 그대로 프라이가 된다고 합니다. 이 곤란하고 어려운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탔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성전 파괴 이후 유대인들은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고, 또한 절기를 지킬 수 없게 된 것이 변화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애가의 시인은 주전 586년 아브 월 9일 이후 마치 광인 처럼 시간을 보냈습니다. 패닉에 빠졌고, 두려움 때문에 생긴 원망과 한탄을 내뱉으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갔습니다. 시간은 속절도 없이 참 잘 흘러 가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아브 월도 지나가고 엘룰 월도 지나갔습니다. 어느새 티슈리 월로 들어섰습니다. 북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고 구름도 몰려 왔습니다. 성전이 무너졌어도 계절은 바뀌고 비는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성전이 무너져도 추수의 계절은 오는가… 하나님도 참 무심하시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욤 키푸르가 지나고 초막절이 다가 온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초막절에는 그래도 성전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건물이야 다 무너져 버렸지만, 그래도 초막절인데, 성전에 가봐야 되지 않겠는가… 아마도 애가의 시인은 반 세겔의 성전세를 준비해서 아침 일찍 성전으로 갔을 겁니다. 그 당시는 성전 산이 뚜렷이 보였을 겁니다. 지금이야 건물의 잔재 위에 또 건물을 짓고 이런 일을 반복하다 보니 성전 산이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살았을 때 성전 산, 즉 모리아 산은 적어도 100미터 이상 높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 위에 성전이  있었지만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불에 타고 깨진 돌들 뿐일 겁니다. 그래도 시인은 초막절이니까 성전에 가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 월 9일 부터 초막절까지 예순 일곱 날… 애가의 시인은 비탄 속에서 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바벨론 군대에 대한 적개심은 같은 민족에 대한 분노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험한 욕설을 유대인들에게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어떤 의미 있는 일이 생기는 게 아니었습니다. 시인의 마음 속에는 유대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솟아났습니다. 견딜 수 없이 강력한 긍휼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시인은 성전 없는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간구할 예정이었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서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 우리는 애가 서 3장의 첫 부분을 묵상 합니다. 애가 서는 모두 66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66절은 3절씩 묶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3절이 1연이 되서 모두 22연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각 연은 히브리어의 스물 두 문자를 그 순서대로 받아들여 각 절의 첫 번째 단어 첫 번째 글자로 삼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1절 부터 18절까지 읽었는데요, 그러므로 우리는 3절씩 묶어 6연을 읽은 것입니다. 그리고 1연은 알렢이, 2연은 베트가 각 절의 첫 단어 첫 글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글자 순서대로 나아가다보니, 6연은 여섯 번째 문자인 바브가 각 절의 첫 단어의 첫 글자가 되었습니다.

절망 속에 있던 시인이 무슨 힘으로 또는 무슨 이유로 이런 외형율을 선택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후대 사람이 애가 서를 이런 식으로 편집을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고기가 없지?” 하셨던 유우머 아닌 유우머를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좀 다른 사람들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 속에서 히브리어 문자 하나하나에 자기 마음을 담은 애가 서 기자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튼 절망 속에서 글자 맞추기는 확실히 일반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애가 서가 채택하고 있는 이 외형율은 애가 서 전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시인은 글자 맞추기를 했단 말인가? 그는 시편 119편의 메시지를 자기 시를 통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려 했단 말인가? 이 점을 생각해 보는 것은 애가 서를 정리할 때 최종 목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에 능통하지 못한 우리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참 어렵게 애가 서 1장과 2장을 묵상한 셈입니다. 일단 이것은 밑도 끝도 없는 넋두리입니다. 패닉에 빠진 사람의 넋두리를 우리가 묵상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넋두리에서 우리는 저 사람 참 어렵구나… 하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찾기가 힘듭니다. 플로베르의 1물1어설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장과 2장을 통과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 희망도 찾을 수 없고 아무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극단의 비참함을 보았습니다. 트라우마에 빠진, 패닉에 빠진, 한 연약한 인간의 의미 없는 아우성만 들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애가의 시인은 “하나님이 없다.”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참 힘든 일을 당하면, 참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나에게 하나님은 없다!란 말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참 존경스럽습니다. 어디서 이런 존경스러운 태도가 나오는 것일까… 저는 깊은 신앙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깊은 신앙심은 조상들의 신앙교육에 바탕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 어머니가 또는 아버지가, 더 나아가서 할머니가 또는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행위를 하셨나… 이것을 기억해 내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자녀나 손주들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부모가 대응한 대로, 조부모가 대응한 대로, 그들은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응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리고 손주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가르쳐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최고의 가치가 바로 신앙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선택이 아닙니다. 신앙을 선택하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말은 없습니다. 신앙은 조부모에게서 부모에게로, 부모에게서 자녀들에게로, 또는 조부모에게서 곧장 손주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고의 힘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가문을 부러워 하고 신앙의 가문이 되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신앙의 가문은 자연스럽게 교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무한 책임으로 받는 복은 참 크지요.

제가 있었던 서울 영락교회는 교인이 5만 이상이 됩니다. 매 주일 2만 이상이 모여 예배를 드리지요. 그런데 영락교회의 핵심 멤버는 50명 수준입니다. 전체 교인의 0.1%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영락교회의 일에 대해서는 무한 책임을 집니다. 언젠가 외국인들을 모시고 외부에 나가 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통 체증 때문에 교회 복귀가 늦어져서 새벽 2시에야 이 분들을 숙소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새벽 2시라 교통편이 없었지요. 할 수 없이 영락교회 핵심 멤버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중에는 정부 고관도 있었고 재벌도 있었고 대학 총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자기 차를 몰고 교회로 오는 겁니다. 압구정동에서, 신사동에서, 멀리 구파발에서… 이들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 때 부터 영락교회를 다닌 사람들이지요.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지키자면서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대형 교회가 대형 사고를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락교회는 대형 교회지만 유형이 좀 다르지요. 과거에 몇 번 이상한 행동을 하더니 지금은 큰 사고를 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핵심이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형 교회가 영락교회 수준이리면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애가 서 3장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시의 내용이 전에 비해 명료해 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넋이 나간 사람의 넋두리 같았던 1장과 2장이었습니다. 그런데 3장에 와서 우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생에 대해 가닥을 잡기 시작한 사람의 말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3장 1절로 들어갑니다. 전에 말씀 드린 대로 1절 부터 3절까지 첫 번째 연을 이룹니다. 그리고 각 절의 맨 앞의 단어가 첫 번째 문자인 알렢으로 시작합니다. 패닉에 빠져 있던 시인이 어떻게 히브리어 문자의 순서를 맞추어서 시를 썼는지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3장 1절 부터 3절까지 읽겠습니다. 첫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아니 하-께베르 라아 아니 쁘-쉐베트 에브라토.” 나는 그 분의 진노로 매를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티 나하그 바욜라크 호쉐크 바 로-오르.” 나를 이끌어 어둠 속에 걸어가게 하시고 빛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크 삐 야슈브 아하포크 야도 콜-하욤.” 온 종일 또 다시 또 다시 손으로 나를 때리십니다.

하나님은 진노는 결국 매로 연결이 됩니다. 수 백 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 진노는 이유가 있는 진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멸망할 짓만 골라서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무수한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를 드셨습니다. 시인은 그 매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경험을 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서 드신 분노의 매를 결국 맞고 말았습니다. 매를 맞으면서 억울한 생각 보다는 민족적 비애를 느꼈습니다. 시인의 신앙은 많이 성숙해 있었습니다. 아브 월 9일 부터 초막절까지 약 80일 동안 그는 성숙해 졌습니다.   

4절 부터 6절까지 두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두 번째 연이라 각 절의 맨 앞의 단어가 두 번째 문자인 베트로 시작합니다. “삘라 브싸리 브요리 쉬빠르 아츠모타이.” 나의 살과 가죽을 낡게 하시고 나의 뼈들을 꺾으셨습니다. “빠나 알라이 바야카프 로쉬 부트라아.” 내 주위로 고통과 수고를 쌓으셨습니다. “쁘마ㅋ하샤킴 호쉬바니 크메테이 올람.” 나를 암흑 속에 살게 하시니 죽은 지 오랜 시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치신 진노의 매는 매서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살과 가죽이 늙어버렸습니다. 80여 일 동안 시인은 폭삭 늙고 말았습니다. 그 늙은 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고통과 수고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으나 죽은 지 오랜 시체와도 같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그 절대적인 암흑 속에 방치된 시체… 그게 바로 시인 자신처럼 여겨졌습니다.

7절 부터 9절까지 세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세 번째 연이라 각 절의 맨 앞의 단어가 세 번째 문자인 김멜로 시작합니다. “까다르 빠아디 브-로 에체아 히크삐드 느ㅋ하슈티.” 나를 둘러 가두셨습니다. 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습니다. “깜 키 에즈아크 바 아샤부에아 싸탐 트필라티.” 내가 울며 부르짖었으나 역시 나의 기도까지 닫아 버리셨습니다. “까다르 뜨라카이 쁘카지트 느티보타이 이부아.” 길을 막으셨습니다. 다듬은 것으로. 그리고 굽게 하셨습니다.

살아 있으나 무덤에 갇힌 시체 같은 몸…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기도 조차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자신의 모든 것에 사슬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영혼에도 기력에도 마음에도 사슬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큰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초막절을 맞아 성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다듬은 돌들이 가던 걸음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듬은 돌들은 본래 성전 산에 놓인 계단석이었습니다. 하지만 계단이 파괴가 되면서 계단석은 흩어져 버렸고 그것은 오히려 성전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10절 부터 12절까지 네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네 번째 연이라 각 절의 맨 앞의 단어가 네 번째 문자인 달렏으로 시작합니다. “또브 오레브 후 리 아르에흐 아리 쁘미스타림.” 내게는 그가 먹이를 기다리는 곰과 같고 비밀스런 장소에 있는 사자와 같습니다. “뜨라카이 쏘레르 바-여파샤ㅋ헤니이 싸마니 쇼멤.” 내 길을 치우시고 나를 찢으시고 나를 내버려 두셨습니다. “따라크 카슈토 바야치이베니 캄마타라아 라ㅋ헤츠.” 나를 화살이 날아가 맞추는 과녁으로 삼으셨습니다.

시인이 성전 산에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초막절은 그런 절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때지요. 그래서 마지막 날을 호샤나 라바의 날이라 하지요. 큰 구원의 날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날 메시야가 오신다고 하지요. 하지만 성전 산은 곰과 사자 같은 맹수들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구원은 커녕 목숨을 부지 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내가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성전 산의 그 오르막 길을 치워 버리셨을까… 오히려 내 마음을 찢으시고 그 상처 그대로 내버려 두셨을까… 하나님께서 쏘신 화살에 시인이 맞았습니다. 성전이 무참하게 파괴된 모습을 시인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3절 부터 15절까지 다섯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다섯 번째 연이라 각 절의 맨 앞의 단어가 다섯 번째 문자인 헤이로 시작합니다. “헤비아 쁘킬르요타이 쁘네이 아슈파토.” 왔습니다. 그의 화살이, 그리고 내 허리에 있는 내 후손들을 맞추셨습니다. “하이이티 싸ㅋ호크 르콜-암미 느기나탐 콜-하욤.” 내가 되었습니다. 웃음거리가. 모든 내 백성의, 그리고 그 날의 노랫거리가 되었지요. “히스삐이야니 밤므로림 히르바니 라아나흐.” 나를 배불리셨습니다. 쓰디 쓴 것으로. 그리고 쑥으로 나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시인이 보았던 진노의 매는 하나님이 쏘신 화살로 나타났습니다. 하필이면 그 화살이 시인의 킬르야를 맞추었습니다. 킬르야는 키드니, 즉 콩팥을 말하는데 시인은 이것을 자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시인의 자손에게 문제가 생겼지요. 자손이 없으면 치욕을 당합니다. 결국 시인은 자기 백성에게 조롱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선지자란 사람이 자손도 없이 산다… 이런 야유가 그치지 않습니다. 참으로 쓰디 쓴 것들이 시인을 괴롭혔습니다. 시인이 어렵게 어렵게 성전 산에 도착했습니다. 성소도 지성소도 다 없어졌습니다. 대리석으로 지은 성전이라 그게 무너질 때 무수히 많은 대리석도 무너져 엄청난 자갈이 되었습니다. 그 자갈 무덤은 검은 그으름이 묻은 채 날카롭게 깨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성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게 시인을 쓰디 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 마당 위에 널부러진 돌 무더기 위에, 돌무더기와 돌무더기 사이 평평한 돌판 사이에 쑥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쑥을 자세히 들여다 볼 기력이 없었습니다. 그는 쓰디 쓴 맛을 보고 있어서 쑥 그 자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쓴 맛으로 생각했지요.   

16절 부터 18절까지 여섯 번째 연이  되겠습니다. 여섯 번째 연이라 각 절의 맨 앞의 단어가 여섯 번째 문자인 바브로 시작합니다. “바야그레스 뻬ㅋ하차츠 쉰나이 히크피이샤니이 빠에페르.” 부수셨습니다. 자갈로. 내 이를. 나를 덮으셨습니다. 재로. “바티즈나아ㅎ크 미샬롬 나프쉬이 나쉬이티 토바.” 던지셨습니다. 샬롬으로 부터. 내 몸을. 내가 복을 내놨습니다. “바오마르 아바드 니츠ㅎ키이 브토아흘르티 메아도나이.” 내가 말합니다. 끊어졌습니다. 나의 힘이. 그리고 주님께 대한 나의 소망이.

시인이 성전 마당에서 본 것은 대리석이 무너지면서 깨진 날카로운 자갈이었습니다. 그 무수한 자갈이 성전 마당을 덮은 것을 시인은 자기의 이를 덮은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가 자갈을 물면 어떻게 될까요? 이가 부러지겠습니까 아니면 자갈이 부러지겠습니까? 시인은 자갈이 자기 이를 덮었다고 합니다.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모습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자갈로 덮으셨다고 합니다. 시인은 결코 하나님을 욕하지 않습니다. 슬프고 괴롭고 아픈 일도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하신 일로 생각합니다. 이런 영성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성전 산에 올라 시인은 절망을 노래합니다. 샬롬도 없고 토바도 없습니다. 평화도 없고 감사도 없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자기 힘이 없어지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시인은 엄습하는 엄청난 절망 속에서 멍청해 지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곳은 성전 산이었습니다. 성전 산은 마당에 빈틈 없이 돌을 깔아 놓았습니다. 혹시 잡초가 돌 사이로 삐쳐 나오면 레위인들은 그것들을 모두 파내버렸지요. 하지만 잡초들의 힘은 셌습니다. 성전 산 돌틈 사이로 돋아나고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쑥이었습니다.    

 

1) 애가 서 1-2장과 3장의 차이를 말해 봅시다.

2) 애가 서 3장의 배경을 초막절 어간으로 보는 이유는?

3) 애가의 시인이 초막절을 맞아 성전을 찾은 이유는?

 

 

 

 

2022년 1월 9일

 

예레미야 애가  2장 11-22절: [11] 내 눈에 눈물이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기절함이로다 [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마태복음 17장 22-27절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의 선생님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나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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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오늘 주보 1면에 올린 사진을 보십시오. 종이 주보는 흑백이라 사진이 뚜렷하지 않으나 홈피에 올린 주보는 칼러라 보기에 좋습니다. 참고하십시오. 밤 하늘의 오로라가 찬란하지요.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황량하고 무거운 벌판 위에 비행기 한 대가 내려 앉았습니다. 동체가 비교적 깨끗한 걸 보니 불시착을 했군요. 하지만 비행기 앞 부분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조종사들이 무사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래 전에 아이슬랜드에서 일어난 사고의 잔재물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희생 당한 콕핏 위에 한 여행자가 걸터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제 눈에는 하늘의 오로라가 빛나고 아름다울 수록 이 비행기의 잔해는 더 처연해 보일 뿐입니다. 비행기는 인류의 손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지요. 그 덕에 우리는 하루 만에 미국도 가고 유럽도 갑니다. 이 기술이 발전해서 이제는 우주선을 만들어 대기권 밖으로도 나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앞에서 인간의 비행기나 우주선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아이들의 장난감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뭔가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 뭔가가 생각보다 빨리 소멸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뭔가 만들라고 하시지요.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성막과 성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들라고 하신 성막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성막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성전은또한  무엇일까요?

성막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두 번째로 호렙산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성막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푸른 하늘에 마치 구름처럼 성막이 나타났었습니다. 모세는 그가 본 성막의 모습 그대로 땅 위에다 그것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정말로 성막을 아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정성을 다해서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후에 생긴 성전도 이스라엘 백성은 매우 아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건성으로 예배를 드린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최선을 대해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주전 586년 아브 월 9일,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70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은 재건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제2 성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 제2 성전도 주후 70년, 또 아브 월 9일에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는 유대인들이 제3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지만 어려워 보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이 땅 위에서 성전을 볼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십니다. 따라서 성막을 있게도 하셨고 없게도 하셨습니다. 다윗 왕이 자기 뜻대로 세운 성전도 하나님은 썩 내켜 하시지는 않았지만 결국 용납하셨습니다. 그러나 400여 년만에 제1 성전은 무너졌고 제2 성전은 500여 년 만에 무너졌습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지금 우리로 하여금 성전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게 하셨을까… 이런 시대와 예수님의 복음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성전을 포기할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워낙 물질적인 표증을 중요시 하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지 않고 회당을 지었지만,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수 많은 사람들은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당이라 또는 성전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엔 이것을 신전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신약성경에 비추어 보면 반칙이고 외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보다 훨씬 더 큰 성당과 성전과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건물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더믹은 이런 노력에 찬물을 붓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애가 서 2장 11절 부터 22절까지를 읽었습니다. 이 비탄의 시에서 애가의 시인은 무너진 성전 뜰에 앉아 있습니다. 주전 586년 아브 월 9일이 지나고 초막절이 다가오는 뜨거운 때였습니다. 포도를 비롯한 여름 과일들을 수확해서 하나님께 드릴 감사제물로 적합한 것을 고르고 있어야 할 때였습니다. 하지만 일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 가고, 성전은 불에 타버렸는데,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비탄의 시를 쓰는 것 밖에 달리 할 일도 없었습니다.

애가 서 2장 11절과 12절은 개인의 애가라 합니다.    

11절은 열 한 번째 문자인 카프로 시작합니다. “칼루브 바뜨마오트 에이나이/ ㅋ하마르므루 메아이 니슈파크 라아레쯔 크베디…” 내 눈의 눈물이 마릅니다. 나의 내장이 끓습니다. 내 간이 땅에 쏟아집니다. 내 딸 백성이 패망했습니다. 아이들과 젖먹이들이 성읍의 길거리에 버려졌습니다.

12절은 열 두 번째 문자인 라메드로 시작합니다. “르임모탐 요아므루 아여하 따간 바 야인…”  그들이 그들의 어미들에게 묻습니다. 어디에 빵과 포도주가 있습니까? 그들은 전쟁에서 다친 자들 처럼 성읍 광장에 누워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은 그들의 어미들 가슴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애가 서 2장 13-17절은 진혼곡이라 합니다.

13절은 열 세 번째 문자인 멤으로 시작합니다. “마-아이데크 마 아담마-라크 하 빠트 예루샬라임…”무엇으로 너에게 증거할까, 무엇으로 너에게 비유할까…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너를 비교하고 너를 위로할까? 내 처녀 딸 시온이여. 너의 파흔이 바다 같이 넓으니 누가 너를 치료할까?

14절은 열 네 번째 문자인 눈으로 시작합니다. “느비이아이크 ㅋ하쥬 라크 샤브아 브 타펠…” 너의 선지자들이 너에게 헛되고 어리석은 예언을 주었구나. 그들이 너의 부정함을 드러내지 못했고 그래서 너의 운명을 돌이키지 못했구나. 그들은 너에게 헛되고 어리석은 말만 했다.

15절은 열 다섯 번째 문자인 싸멕으로 시작합니다. “싸프쿠 알라이크 카파임 콜-오브레이 데레크…” 모든 사람들이 지나가며 너를 보고 손뼉을 치며 비웃고 머리를 흔든다.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자, 이 땅의 모든 즐거움이었던 예루살렘이 바로 너란 말이냐?

16절은 열 여섯 번째 문자인 페로 시작합니다. “파추 알라이크 피헴 콜-아오이바이크 샤르쿠…” 너의 모든 적들이 너에게 야유 하고 비웃으며 이를 간다. 그리고 외친다. “우리가 너를 박살냈지. 그렇다. 바로 이 날을 우리가 소망 했었지. 우리는 이 꼴을 보기 위해 살았지.

17절은 열 일곱 번째 문자인 아인으로 시작합니다. “아싸 아도나이 아쉐르 자맘 비차아 에므라토…” 주님께서 스스로 목적하던 바를 이루셨도다. 그의 맹세를 이루셨도다. 그가 오래 전에 명령하신 것을… 그는 불쌍히 보지도 않으시고 찢으셨도다. 그가 적들로 하여금 너로 인해 즐겁게 하셨도다. 그 적들이 날뛰게 하셨도다.

애가 서 2장 18절 부터 22절까지는 개인의 애가라 합니다.  

18절은 열 여덟 번째 문자인 차데로 시작합니다. “차아크 리빰 엘-아도나이 ㅋ호마트 바트 찌온…” 그들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딸 시온의 성벽이여 강처럼 눈물을 흘려라. 밤새도록. 조금도 쉬지 말아라. 네 눈동자를 감지 말아라.

19절은 열 아홉 번째 문자인 코프로 시작합니다. “쿠미 론나이 발라일 바-라일라…” 일어나라. 밤에 부르짖어라. 파수꾼이 일을 시작할 때에. 내 심장을 물 처럼 쏟아라.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네 손을 하나님께로 향해 들어라. 너의 어린 아이들의 생명을 위해서. 모든 길거리에 버려져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 시인은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을 위해 지금의 국면을 타개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시인도 압니다.

20절은 스무 번째 문자인 레쉬로 시작합니다. “르에 아도나이 브-하삐타  르-미 올라르타…” 오 주님, 보십시오. 주께서 누구에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슬프다. 여인들이 그들의 첫 열매를 먹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그들이 먹었습니다. 슬프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주님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21절은 스물 한 번째 문자인 쉰으로 시작합니다. “샤크부 라아레츠 ㅋ후초트 ㅋ후초트 나아르 브 자켄…” 젊은이와 늙은이가 다 길바닥에 자빠져 있도다. 나의 처녀들과 청년들이 모두 칼에 맞아 나가 떨어졌도다. 당신이 그 진노의 날에 이들을 죽이셨습니다. 조금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22절은 스물 두 번째 문자인 타브로 시작합니다. “티크라아 크욤 모에드 므구라이 미싸비이브…” 당신이 모아 들이셨네요. 마치 절기를 즐기기 위함 처럼… 주변에서 친지들을 모아 들이듯이… 주님의 진노의 날에 아무도 살지 못했고 도망 가지 못했습니다. 내가 낳아 기른 아이들을 내 적들이 다 없애고 말았습니다.

애가의 시인이 초막절을 맞아 성전이 있던 곳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는 초막절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는 날이지요. 만약 메시야가 오시지 않으면 토라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는 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애가의 시인은 이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마법의 피리에서 처럼 아이들이 다 없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가의 시인은 성전 터에서 뭔가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애가의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역시 사람이니까요. 요즘 참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더믹 때문에 삶이 답답해 진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미쉬나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던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이미 돌아가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랬다고 합니다. “죽는 것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무섭기도 하다. 그러나 잘 준비해서 죽음을 맞으려 한다.”

그렇지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삶도 무섭고 죽음도 무섭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성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복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이것을 좀 더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만큼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울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의 선배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여러가지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그 최초의 제도가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성막에 관련한 일들을 독점적으로 맡기셨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본디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맡게 하실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남들이 아니라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성막의 일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속전의 문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속전이란 자기 대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돈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속전을 히브리어로 ‘카페르’라 하고 영어로는 ‘랜섬’이라 합니다.

먼저 민수기에 나오는 속전에 대해 알아봅니다. 민수기 3장 39절에 따르면, 레위 지파 사람들 가운데서 1개월 이상된 남자의 수는 2만 2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 43절에 따르면, 레위 지파 사람들을 제외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1개월 이상된 장남 수는 2만 2천 2백 7십 3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백성의 1개월 이상된 장남 수는 레위 지파의 1개월 이상 된 남자의 수보다 2백 7십 3명이 더 많은 셈입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 사람들은 273명 분의 일을 더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273명 분의 속전을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주되 두당 5 세겔씩 계산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속전은 계산하기가 어려웠는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속전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장 11절 부터 16절까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은 자기 생명의 속전으로 반 세겔씩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아마도 매년 초막절에 드렸을 겁니다. 하나님은 반 세겔씩 속전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병이 없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속전은 부자라고 더 내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는 것도 아니라고 덧불이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출애굽 원년의 반 세겔 속전의 총합은 30만 세겔이 넘는 셈이 됩니다. 이것은 성막을 운영하는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재원이 되었습니다. 이 반 세겔 속전은 살아남았고 예수님 시대에도 시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아까 말씀을 드렸지만, 성전세는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간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성전에다 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초막절에도 성전에 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성전 사람들은 초막절이 가까워 지면 모든 유대인 마을에 관리를 보내서 성전세를 걷게 했습니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반 세겔의 속전을 거두었습니다. 문제는 그 관리가 성전세를 거둔 다음에 스스로 자기 수고비를 산정해서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수고비야 추상적이고 다다익선이지요. 이게 사실 유대인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쏠쏠한 수입이라 없앨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 성전세 전통이 남아있어서 성전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 초막절이 가까워진 어느 시점이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시고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 아지트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반 세겔의 성전세를 걷는 관리를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관리를 보셨겠지만 반 세겔을 지급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베드로를 붙잡고 말했습니다.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집안으로 들어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는 통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법 앞에 평등하기 때문에 왕자라도 관세와 국세를 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는 왕국이었고 왕국은 왕이 백성으로 부터 관세와 국세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왕족은 관세와 국세로 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임금들이 관세와 국세를 아들에게 받느냐 타인에게 받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임금이 왕자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지는 않지요. 타인에게 받겠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그렇다. 왕자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인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다가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이것을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성전세로 관리에게 주라.”

여기서 바다는 갈릴리 호수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부르곤 합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조그만 강들에 비하면 갈릴리 호수는 유대인의 눈에 바다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낚시대를 들고 갈릴리 바다로 가서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으므로 금방 물고기를 잡을 겁니다. 그런데 그물이 아니고 낚시로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지요. 한 마리만 빨리 잡으란 뜻입니다. 그런데 낚시로 잡힌 물고기는 미끼를 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잡은 물고기의 입을 벌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입 속에 동전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미끼를 빼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는 한 세겔 이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 자신과 베드로의 성전세 1세겔을 내라고 하신 겁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성전세 관리에게 넘겨 주면서 두 사람 분 성전세라고 할 수도 있었겠네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전세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성전세는 고대 속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출발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단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성전세에 대해 부정적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버리셨다는 인식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성전에다 성전세를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보신 겁니다. 애가의 시인은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면서 회복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이와 다르셨습니다. 오히려 당시에 개축이 되고 있었던 제2 성전까지 파괴가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셨지요. 요한복음 2장 19절은 이 대목을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당신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제자들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동시대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 듣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때 이 말씀을 성전 모독죄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이 확실해도 거기에 인간의 욕심이 끼어 있다면 그것은 성전 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여전히 애가 서를 묵상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도 인간이 잘 못 운용하면 예루살렘 성전 처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욕심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절망은 결코 절망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은 희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아마 애가의 시인도 절망 중에 희망을 발견했을 겁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 그는 절망을 깨뜨리고 희망을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땅에서 삶을 이어 가게 하신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 봅니다. 그리고 성전에 끼여있는 인간의 욕심을 생각합니다. 순수한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순수하고 진실한 교회 속에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며 우리에게 삶의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이유를 알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절망 속에 있던 애가 서 시인이 희망을 보듯이 우리도 그렇게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큰 나무로 자라서 수 많은 사람들이 깃들여 살게 될 것입니다.

다시 주보 1면의 사진을 봅니다. 인간의 기술은 저 비행기까지 입니다. 하늘을 날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비행기… 그래서 우리는 비행기가 내는 그 큰 소리를 참았습니다. 하늘을 날기 위해서 큰 소리는 불가피한 것… 하지만 하나님께서 추운 하늘을 날게 하신 오로라는 소리가 없습니다. 화려하고 찬란한 오로라지만 소리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늘에서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기본적인 인간이란 피조물의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1) 애가 서 시인의 지리적 시간적 위치에 대해 말해 봅시다.

2) 애가 서 시인이 절망 속에서 찾고 있는 게 무엇입니까?

3) 애가 서 시인의 마음 속에 좌정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2022년 1월 2일

 

예레미야 애가  2장 1-10절: [0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0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 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03]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04]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05]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06]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07]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 [08]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09]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자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10]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마태복음 10장 28-33절: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으냐 그너라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올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추운 겨울 이른 아침, 양지 바른 곳에 있는 나뭇가지에 참새 몇 마리가 무리 지어 앉아 있습니다. 추운지 서로 몸을 엉겨 붙였습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온혈동물이라 그렇게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견뎌내고 있었지요. 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편 102편 7절에 따르면 지붕 위에서 밤을 새우는 참새가 있었나 봅니다. 설마 밤을 새웠을까… 쪽잠이라도 잤을 겁니다. 그런데 시편 84편 3절에서 기자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새와 제비까지 돌보신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따르면, 두 마리에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6절에 따르면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섞으면, 두 앗사리온으로 참새 네 마리를 사면 한 마리는 덤으로 준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덤으로 끼워 주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29절 하반절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누가복음 12장 7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0-31절도 같은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인생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실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시인이란 부인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역과 삶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주일 설교에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큰 바위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내 얼굴이 예수 그리스도 처럼 변하게 되겠지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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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 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기서 말하는 참새가 진짜 참새인가 해서 찾아보니 ‘스투르디온’으로 나오더군요. 스투르디온에서 영어의 스패로우가 나왔습니다. 확실히 참새란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참새를 즐겨 먹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2장 6절에 따르면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고도 하셨습니다. 참새 값이 더 저렴해 졌습니다. 한 앗사리온에 두 마리를 주지만, 두 앗사리온이면 네 마리에다 덤으로 한 마리를 더 얹어 주었나 봅니다. 아무튼 이것은 비싸지 않은 가격입니다. 그리고 이때 참새는 구이로 팔렸을 겁니다. 아마 나그네의 한 입 거리 간식이 되었겠지요.

종로1가 피맛골에도 참새 구이집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 집에서는 참새 두 꼬치를 만 원에 팔고 있습니다. 요즘 참새구이가 흔치 않아서 그런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 참새구이의 값이 참 쌌습니다. 곳곳에 참새구이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파는 번데기가 한 봉지에 100원이었습니다. 참새 구이는 한 꼬치에 5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몸집이 작은 참새가 구워져 있는 게 징그러워서 멀지감치 서서 바라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우 좋아한 간식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런 참새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중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사람이 참새보다 귀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말씀 바로 뒤에 나온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몇 일 전 검찰총장 출신의 대통령 후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검찰 수사를 받던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자, 그런 건 별일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사 과정의 자살이라는 것은 수사하는 사람들이 세게 추궁하고 증거수집도 열심히 하니까… 지금 수사 진행되는 것 말고 또 내가 무슨 뭐 걸릴 게 있는가 하는 불안감에 그런 극단적인 선택도 하는 것이지…” 저는 이 말을 듣고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런 말이 참새 한 마리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심판을 받을까…

참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우리나라 검찰이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UN이 발표한 선진국에서 검찰 조사를 받던 사람이 자살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검찰은 그걸 별일이 아닌 것 처럼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공권력인 검찰이 불법적으로 우리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참 한심하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런 검찰을 국민이 통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 말씀…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 한가한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새들이 숱하게 잡혀서 구이가 되었고, 그보다 더 귀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지만, 얼마나 많이 학살을 당했습니까?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독특한 문학 양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문학을 통해 현실과 신앙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참한 결말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우리에게 뭔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이런 해석을 우리는 애가 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천상에 계신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는지… 지상에 있는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세상에 계획하신 바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계획은 결코 실패가 될 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하나님의 계획은 착착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대적 사고 또는 유대적 문학 양식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성경을 사실적으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가 우리의 몸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존재는 결코 우리의 영혼까지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은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라는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리켜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라고 선포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을 죽일 수 있는 자보다 우리 몸과 영혼을 다 죽일 수 있는 자를 두려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몸보다 영혼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몸과 영혼… 이게 분리가 돼? 이런 의문이 들어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용기를 낼 수 있고, 아울러 애가 서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애가 서 2장 1절 부터 10절까지 묵상합니다. 본래 11절까지 묵상하려 했으나 11절 부터 다른 쟝르가 시작된다고 하여 11절은 다음 주일로 미루었습니다. 오늘은 진혼곡으로 분류된 10절까지 다루고, 다음 주일에 개별적 애가와 진혼곡이 섞여 있는 2장 11절 부터 22절까지를 다룹니다.

2장 1절은 히브리어 첫 번째 문자인 알렢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1장과 2장은 각기 다른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가 서 시인이 그렇게 디자인 한 것이지요. 그 내용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내는 것은 우리 묵상자들의 임무라 할 수 있습니다. 2장 1절은 1장 1절과 마찬가지로 에이카…로 시작합니다. 슬픔을 나타내는 감탄사입니다.  “에이카… 야이브 쁘-아포 아도나이 에트-빠트-치온…” 애가의 시인은 예루살렘을 빠트-치온이라 부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과 그 아름다운 성읍을 가리켜 시온의 딸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딸은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있어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예루살렘을 진노로 덮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애가의 시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아- 슬프다… 주님께서 진노로 딸 시온을 덮으셨도다 …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으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천상에서 아름다웠던 존재가 지상으로 떨어져 쓰레기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은 발을 둘 곳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발가락 하나만 아파도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발을 둘 곳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질 수 밖에 없지요. 애가의 시인은 이것이 슬펐습니다. 근거가 없어졌으니까요.

2절은 히브리어 두 번째 문자인 베트로 시작합니다. “빌라아 아도나이 로 브-로 ㅋ하말 에트 콜-느오트 야아코프…” 주님께서 삼키지 않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부정에 부정이 겹쳐 강한 부정을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삼켜 버리신 것은 야곱의 주거지였습니다. 야곱의 살림집을 하나님께서 없애 버리신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를 허물어 땅에 엎어지게 하셨습니다. 성채는 산산조각이 나서 들판에 나뒹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그 통치자들은 수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포도가 농부들에 의해 거두어 져서 포도주 틀에 들어가 짓이겨 지듯이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그렇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는 말이지요.     

3절은 히브리어 세 번째 문자인 김멜로 시작합니다. “까다아 빠ㅋ하리-아프 콜 케렌 이스라엘 헤쉬이브 아ㅋ호르…” 애가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다고 합니다. 뿔이 무엇입니까? 명예의 상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많은 뿔 가진 짐승들은 그 뿔로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뿔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뿔을 휘두르며 자기 자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명예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막대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들을 자르셨다고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무엇으로 자기의 명예를 지킬 수 있을까요? 아니,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그 오른 손을 뒤로 거두셨다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수수방관을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로 이스라엘의 동서남북을 태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4절은 히브리어 네 번째 문자인 달렏으로 시작합니다. “따라크 카쉬토 크오예브 니짜브 여미노 크짜르 바야하로그 콜 마ㅋ헤마떼이-아인…” 하나님께서 활을 들고 서시더니 시위를 당기셨습니다. 화살이 튀어나갔지요. 그런데 그 화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온의 딸들이었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수들을 죽이듯이 죽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시온의 딸들에게 불처럼 하나님의 노가 쏟아졌습니다.

5절은 히브리어 다섯 번째 문자인 헤이로 시작합니다. “하야 아도나이 크오예브 삘라아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주님이 이스라엘의 원수처럼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궁들을 삼키셨습니다. 그리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딸 유다에게 근심과 애통이 배가될 뿐이었습니다. 애가의 시인은 모든 험악한 일들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다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 문학의 특징적인 표현이지요.

6절은 히브리어 여섯 번째 문자인 바브로 시작합니다. “바야ㅋ흐모스 카-간 쉬ㅋ헤트 모아도 쉬카ㅋ흐…” 하나님께서 그 동산처럼 초막을 부숴버리셨다고 애가의 시인은 노래합니다. 아브 월 9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은 여전히 흘렀습니다. 두 달이 지나 욤 키푸르가 왔고 그로 부터 닷새 후에 초막절이 왔습니다. 하지만 욤 키푸르도, 초막절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애가의 시인은 이것을 몹시 괴로워 했습니다. 그래서 동산처럼 초막을 부숴버리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동산은 에덴 동산을 상기시킵니다. 초막은 수카, 즉 초막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애가 시인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부숴버리셨듯이 초막절을 부숴버리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부숴버리신 적은 없지요. 타락한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막으신 겁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다 부숴버리셨지요. 이스라엘에게서 구원이 떠나버렸습니다. 애가의 시인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부숴버리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초막절에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 그런데 초막절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애가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절기를 폐하셨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시온의 절기를 잊어버리셨다고 합니다. 그 절기는 바로 초막절이 아닌가 합니다. 티샤 브 아브가 지나고 두 달 여 만에 찾아온 초막절이지요. 그러나 성전이 파괴된 그때 애가의 시인에게 초막절은 도무지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수카, 즉 초막은 왜 세웠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폐하신 것은 초막절 만이 아니었습니다. 인식일도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다고 합니다. 애가의 시인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고 탄식합니다. 안식일은 모든 절기의 기본이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모든 절기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고 하지요. 오늘날 우리는 주일이 위협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이 주일을 지킬 수 없으면 다른 모든 것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일주일에 하루 하나님께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 이게 하찮은 게 아닙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일을 지킬 수 없게 되는 것… 이것은 재난이고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벌이 되겠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은 최소한의 신앙생활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평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였으며, 이방인들에 의해 무장해제가 되고 결국 이방인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7절은 히브리어 일곱 번째 문자인 자인으로 시작합니다. “자나ㅋ흐 아도나이 미즈쁘ㅋ호 니에르 미크따쇼 히스기르 브-야드-오예브…” 이제 애가의 시인은 성전이 불 탄 자리로 가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초토화 되었습니다. 어디가 성소이고 어디가 지성소란 말인가… 성전의 중요한 기물들은 다 도둑질을 당하고 말았고 기초를 이룬 돌들만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그 돌들마저 화재로 인한 그으름 때문에 검게 변해 있었습니다. 애가의 시인은 이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제단을 돌리셨고 그의 미크베를 닫으셨으며 그 벽을 원수들에게 넘기셨습니다… 통탄할 노릇이지요. 성전이 무너진 곳에서 원수들이 떠들고 있었습니다. 초막절 바로 그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원수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떠들어 대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그 쓴 맛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8절은 히브리어 여덟 번째 문자인 헤트로 시작합니다. “ㅋ샤브 하쉠 르하쉬ㅋ히트 ㅋ호마트  빠트-치욘…” 작정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정교하게 성벽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줄을 띠고 무너뜨리셨습니다. 이 일에서 결코 손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성벽과 성곽이 무너졌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요란했을까요? 애가의 시인은 이것을 성벽과 성곽이 통곡하게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성벽과 성곽이 무너졌으니 그 안이 온전할 리 없습니다. 그들이 함께 쇠하고 말았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은 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9절은 히브리어 아홉 번째 문자인 테트로 시작합니다. “타브우 바아레쯔 슈아레이하 이빠드…” 땅 속으로 들어가 부숴졌습니다. 성의 문들이… 예루살렘의 거의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니 옛날은 더더욱 그랬습니다. 돌은 무겁습니다. 만약 건축물이 무너져 돌무더기가 되면 그 아래에 깔려 있는 문들은 땅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문이 반쯤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아예 땅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입구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성문이 땅 속으로 들어가면 빗장도 부숴져 버리겠지요. 애가의 시인은 이 빗장을 율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사라져 버렸으니 왕과 지도자들이 이방인들 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이 없으므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묵시는 ‘ㅋ하존’이란 단어를 씁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46장 부터 51장까지에서 만났던 신탁을 말합니다. 율법이 없어지면 이런 신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10절은 히브리어 열 번째 문자인 요드로 시작합니다. “예슈부 라아레쯔 이따무 지크네이 바트-치욘…” 앉아서 조용하네요. 그 땅, 딸 시온의 장로들이… 그들은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의 모습입니다. 또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의 브툴라들은 머리를 땅에 대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처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모습이지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 하면서 살아라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는 말씀과 직결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시인 하면서 산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 하면서 산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인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시인 하겠다고 하셨을 때, 그 시인의 헬라어 원어는 ‘호몰로게오’ 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인 하겠다고 하셨을 때, 그 부인은 헬라어 원어로 ‘아르네오마이’ 입니다. 그리고 ‘아르네오마이’는 히브리서 11장 24절에 쓰였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하는 말씀 속에 나오는 거절… 이게 바로 ‘아르네오마이’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아르네오마이’의 반대어가 ‘호몰로게오’가 되겠습니다. 호몰로게오는 받아들이다, 허락하다는 의미입니다.

작년 봄에 다락에 있던 책들을 서재로 옮겼습니다. 많은 책들 중에서 일본에 관한 책들만 모아 한 곳에 꽂았더니 한 칸을 다 채우더군요.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들 가운데 몇 권을 들어 내용을 살펴보니 가물가물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 중 소개할 만한 책들이 ‘에도의 여행자들’과 ‘도꾜 이야기’ 입니다. 일본의 사회 정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카스트 제도가 인도에만 있는 줄 아는데, 사실 일본도 카스트 제도가 있는 나라입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 그렇습니다. 일본에서는 왕족이나 귀족 가문 출신 중에서 정치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정치는 가업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다 그 사람에게 투표를 합니다. 아직도 주인님과 종놈들이란 인식이 남아있는 게 일본 사회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기치를 내세우며 선거에 의해서 정치 지도자로 선출이 되는 평민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자민당 이외의 정당은 존립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 풍토가 결국 일본의 몰락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친일파가 이와 똑 같습니다. 친일파는 전수 받은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정관계, 경제계, 언론계, 군대, 학계에 진출하여 엘리트 카르텔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엘리트 카르텔 국가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선출 엘리트들이 선출 권력을 무시합니다. 무시할 뿐만 아니라 협박까지 합니다. 최근에 검사 출신 정치인이 아들을 통해 50억 원의 뇌물을 받았는데 검찰은 혐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평론가는 친일파 엘리트들은 니들이 어쩔래? 하는 행태를 보인다고 했습니다. 검사 출신 대통령 후보 부인이 다소 잘못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잘못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평론가에 따르면 이것도 니들이 어쩔래? 하는 행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X세대는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X세대란 1960년대 후반 부터 1970년대 말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이지요. 카스트를 용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훈련이 되어 있으며, 아울러 경제적으로도 자신감이 있는 세대지요. 이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민주화의 선봉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이데올로기적이라서 깃발부대라는 평판도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Y세대와 Z세대는 좀 골치가 아픈 사람들입니다. 이데올로기적인 X세대를 지겨워 하기 때문이지요. Y세대는 1980년 부터 1995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로 경제발전을 경험한 세대라고 합니다. 이들을 가리켜 에코 세대 또는 밀레니엄 세대, 즉 M 세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Z세대는 1995년 이후, 즉, 20세기 말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20세기 마지막에 태어났다고 해서 알파벹의 마지막 글자인 Z를 써서 Z세대라고 합니다. Y세대는 어려서 부터 PC와 인터넷을 사용해 왔는데 Z세대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을 사용해 왔습니다. 게다가 세계화를 경험했지요. 그래서 Y세대와 Z세대는 종교나 철학이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부모 세대가 이룬 경제적 바탕 위에서 소비를 즐긴다고 합니다. SNS와 게임을 즐기고 고급 차를 선호하며 세계 여행을 즐긴다는 말이지요.  

친일파 엘리트 카르텔이 니들이 어쩔래? 하면서 협박을 하면 X 세대는 분연히 일어나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Y세대와 Z세대는 돈만 주면 니들이 다 해먹어도 된다고 한답니다. 이게 바로 20대가 국민의힘 당을 지지하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교회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 하고 철학을 골치 아파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교회의 당면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다음 세대에게 돈과 권력을 거부할 수 있도록 ‘아르네오마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할 수 있도록 ‘호몰로게오’를 가르쳐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모세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파라오가 니들이 어쩔래? 했을 때 모세는 결코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고 했습니다. 세속의 힘으로 누르려는 파라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열 가지 재앙을 동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것으로 파라오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후 모세는 이집트라는 악의 소굴에서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바라보고 있던 중다한 잡족들까지 모두 구원해 냈습니다.

새해 첫 주일을 맞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실 거라는 말씀…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제일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본받는 자세를 갖는 것이지요. 이게 그리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우리가 스마트 폰에 능숙해 지고 인공지능에 익숙해 져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과 인공지능에 어떤 인문학적 가치가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인생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스마트 폰과 인공지능이 보급이 되면 될수록 외로운 사람들은 더 많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불확실성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오직 한 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구원의 길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그래서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참 매력적인 것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세대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복을 받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1)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유대인의 문학적 표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2) 애가 시인의 고통에 대해 말해 봅시다.

3) 애가 2장은 어떤 시점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까?

4)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2021년 12월 26일

 

예레미야 애가  1장 12-22절: [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마태복음 2장 1-12절: [0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0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0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0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0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0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0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0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0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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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길지 않은 내 인생 길  

   

예레미야 애가 서를 묵상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닥을 경험했다는 말을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닥을 뚫고 들어가서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영성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영성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으로 얻어지는 것이고 지식을 초월한 예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러니 지식의 영역에서 애가 서를 묵상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일까요? 이런 점에서 저 역시 불쌍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으로 애가 서를 탐구하는 것은 그러다 예지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뭔가 좀 주셔서 깊이가 있고 아름다운 영성을 소유하고 싶어서 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마음으로 애가 서 묵상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애가 서 1장 12절 부터 22절까지 묵상합니다. 12절 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서는 외형율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이 외형율은 히브리어의 스물 두 개 문자를 차례대로 적용시키며 문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12절은 열 두 번째 글자인 라메드로 시작합니다. 주보의 예배 순서 옆란에 오늘의 본문을 히브리어로 올려 놓았습니다. 시작 문자를 좀 더 큰 글자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물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지요.

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로 엘레이켐 콜-오브레이 테레크 하삐투…” 모든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여, 나의 고통은 너희들과 관계가 없단 말이냐… 이 고통은 그 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시인은 예루살렘 멸망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신 고통으로 보았습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어서 더욱 더 아팠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그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어제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고통을 당하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이게 무슨 사람입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보였습니다.  

13절 입니다. 열 세 번째 문자인 멤으로 시작합니다. “밈마롬 샬라흐-에슈 쁘-아츠모타이 바-이르뗌나 파라쉬 레쉐트…” 높은 곳에서 나의 뼈 속으로 불을 보내사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펴시고 나로 물러서게 하시니 종일 나를 피곤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셨도다… 그러나 시인도 이상한 것을 느낍니다. 고통을 이겨내고 고통 밖에서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뼈 속에 불을 넣으셨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통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시인은 내부로 고통의 무게를 느꼈습니다. 피곤하고 황폐한 고통의 본질을 그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무감각해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예레미야가 다른 점인지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좀 더 예민한 사람입니다.

14절 입니다. 열 네 번째 문자인 눈으로 시작합니다. “니슈카드 올 프사아이 쁘-야도 이슈타르구 알라부 알 차부아리이…” 내 죄악을 그의 손에 묶고 얽어매 내 목에 올리셨고 나의 기력을 못쓰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넘기셨도다. 고통을 당했던 시인은 지금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통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시인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힘이 빠져버린 시인은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음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점이 오히려 시인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15절 입니다. 열 다섯 번째 문자인 싸멕으로 시작합니다. “씰라 콜-아삐라이 아도나이 쁘키르삐 카라 알라이 모에드…” 모든 힘 있는 것들을 주님께서 밟아버리셨네요. 절기를 맞아 모였던 청년들까지 하나님께서 부숴버리셨네요. 처녀 딸 유다마저 주님이 술틀에서 밟아 으깨버리셨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힘이 없어진 것을 슬퍼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생각하는 청년들과 처녀들마저 밟아서 으깨버리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유다의 미래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렇게 밟으시고 부숴버리시고 으깨버리셨으니…

16절 입니다. 열 여섯 번째 문자인 아인으로 시작합니다. “알-엘레 아니 브키야 에이니 에이니 요르다 마임…” 이로 인해 내가 웁니다. 내 눈에서 물같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나를 위로해 주시고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실 분이 멀리 떠났습니다. 원수들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내 자녀들이 외롭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미래도 없는 것 같이 여겨지니 시인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시인은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 희망이 있지요. 멀리 떠나신 하나님은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죽지 않으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희망이 있는 자입니다.

17절 입니다. 열 일곱 번째 문자인 페로 시작합니다. “페르싸 치온 쁘-야데이하 에인 므나헴 라하 치부…” 시온이 그 손을 펼쳤으나 그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하여 야곱의 원수가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 원수들 사이에서 불결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란 이름 대신 야곱이란 이름을 사용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한참 시험을 받을 때의 이름이지요. 야곱이란 이름으로 그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야곱이란 이름 앞에는 적들 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이 보는 야곱이 겪는 고통은 야곱이 잘못을 해서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해서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요즘도 우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저렇게 따돌림을 받으며 고통을 받는 것은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정하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으로 부터 2500년 전에 이미 그런 수치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치에 대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18절 입니다. 열 여덟 번째 문자인 차데로 시작합니다. “차티크 후 아도나이 키 피이후 마리이티…” 의로우십니다. 주님. 하지만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보십시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항상 공의롭지요.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내가 당하는 고통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처녀와 청년들이 사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활기가 없고 미래가 없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19절 입니다. 열 아홉 번째 문자인 코프로 시작합니다. “카라티 라므아하바이 헴마 림무니 코하나이…”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속였습니다.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목숨을 일으킬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서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고통을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빴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그들은 성 안에서 정신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그들이 드디어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20절 입니다. 스무 번째 문자인 레쉬로 시작합니다. “르에 아도나이 키-차르-리 메아이 하마르마루 네흐파크…” 보십시오 주님. 내가 환난을 당해 애를 태웁니다. 내 마음이 상합니다. 당신에 대한 반감이 큽니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는 죽음 같은 게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노래합니다. 시인의 마음은 매우 고통스럽고 하나님께 대해 나쁜 감정이 생깁니다. 집 밖에서 아들이 죽고 집 안에는 죽음의 모습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21절 입니다. 스물 한 번째 문자인 쉰으로 시작합니다. “솸므우 키 네에나카흐 아니 에인…” 그들이 나의 탄식을 들었지만 나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유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어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시인은 원수들에 대한 증오심을 결코 삭이려 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원수들이 오히려 자기를 비웃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심판의 날이 임하도록 기도합니다. 시인은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 데서나 그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시인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합니다.  

22절 입니다. 스물 두 번째 문자요 마지막 문자인 타브로 시작합니다. “타보 콜-라아탐 르-프네이카…” 그들의 모든 악을 주님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으로 내게 행하신 것을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내 마음이 병들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문제와 원수들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거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탄식과 마음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바닥에서도 지하로 떨어진 자신의 신세를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토로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만 신뢰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가 서 기자의 영성입니다. 무서운 것이지요.    

애가 서 기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상황을 따라가지 않았고 어떤 이익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받는 고통은 상황이나 어떤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메시야 대망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애가 서 기자의 놀라운 신앙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신앙은 그의 피를 이어받은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한 예를 마태복음의 탄생설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나 이스라엘 백성 또는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는 메시야 대망 사상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대망 사상에 따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가 이 세상을 구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거라고 믿고 있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동방박사란 바벨론에서 살던 유대인 학자들을 말합니다. 바벨론 포수 이후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자리를 잡고 재산을 모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는 많은 유대인 거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거부들은 학자들에게 돈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연구하게  했습니다. 성경 두루마리를 편찬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서를 쓰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탈무드가 나오게 되었지요. 이 바벨론 탈무드는 전체 탈무드의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예레미야 시대 이후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멸망했고, 페르시아는 결국 헬라인들에게 멸망했습니다. 헬라인들은 바벨론 성을 파괴하고 성을 쌓았던 무수한 돌들을 건축 자재로 활용했다고 합니다. 헬라인들은 무너진 바벨론 성 옆에다 셀레우키아 성을 세웠습니다. 이후 파르티아가 메소포타미아의 패자가 되자 셀레우키아 성 옆에다 크테시폰 성을 세웠습니다. 크데시폰 성은 로마제국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제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하고 있을 때, 가나안 땅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이때도 여전히 바벨론은 오리엔트의 중심으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바벨론에서 살면서 상류사회를 이루어 갔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학자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마고스’라 불리워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고스는 헬라어인데 복수는 ‘마기’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Magician이란 단어가 나왔다고 합니다. 매지션을 대개 ‘점성술사’라고 번역하는데 우리 말 성경은 이들을 동방박사라고 번역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바벨론의 마기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세상 일을 짐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만든 책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주역과 비슷한 책입니다.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대인들의 카발리즘과 주역은 매우 비슷하다고 합니다. 주역이 바벨론산인지 또는 중국산인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주역은 오늘날 동양철학의 핵심이 되는 책이지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가 근거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별을 보던 마기들이 유대인의 왕이 나신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 마기들은 유대인의 왕이 나신 것을 당연히 헤롯 궁에서 왕자가 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의 궁전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좀 더 깊게 생각해 봤으면 헤롯 궁전을 찾아간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들 스스로 알게 되었을 겁니다.

그들은 수 많은 바벨론 신화들과 그리이스 신화들을 통해서 왕의 운명을 타고 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왕으로 태어난 아기라니… 이런 아기에게 당대 왕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마기들은 헤롯궁을 찾아가서 왕으로 나신 이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선물도 있었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 가장 비싼 물건들이었습니다. 선물이 세 개라서 동방박사도 세 명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 봐도 세 명 이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도 바뀌었습니다. 통일찬송가는 ‘동방박사 세 사람’이라고 했는데 새찬송가는 ‘동방에서 박사들’이라고 했습니다. 동방박사가 몇 명인지 모르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헤롯 궁에 들러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이 났다고 합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엔젠가 유대인의 왕이 오시면 자리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왕권을 쉽게 내줄 수는 없지요.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마기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말했지만 헤롯 왕은 그를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선지자의 기록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느비임 두루마리에 있는 미가 서 2장의 기록입니다.

마기들은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이며,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거란 예언을 하필 헤롯 궁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헤롯 왕은 마기들을 불러서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아기를 보고 돌아올 때 보고를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물론 헤롯은 그 아기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마기들은 헤롯 궁을 나와 베들레헴으로 길을 잡았는데 그때 바벨론에서 보던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을 인도했고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춰 섰다고 합니다. 마기들이야 별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니 그 별이 그 별이란 것을 쉽게 알았을 터이고 그만큼 기뻐했을 겁니다. 그들은 집에 들어가서 아이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따로따로 포장되어 있는 게 아니었군요. 보배합에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이후 마기들은 꿈에 나타난 천사가 헤롯에게 가지 말라고 해서 예루살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여 바벨론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마 요르단으로 난 길을 통해 사막을 경유 바벨론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이후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헤롯 왕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이에 순종하여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간 곳은 카이로의 모카탐 언덕이었습니다. 나일강이 내려다 보이고 그 강 건너에는 쿠프의 피라미드 등 여러 개의 피라미드가 있지요. 아브라함도 봤고 야곱도 봤고 예레미야도 봤을 파라미드들입니다. 모카탐 언덕은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여기에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으며 예수님의 피난교회도 있습니다. 피난교회는 아기 예수가 살았던 석회암 동굴 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마기, 즉 동방박사들이 주고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팔아서 생활비로 썼을 거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했습니다. 그 부모는 이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닥 인생이었던 목자들도 이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방에서 온 마기들도 이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향한 고통이 뒤따라 왔습니다. 그 고통은 선의로 헤롯궁에 들렀던 동방의 마기들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 마기들은 예레미야 시절에 바벨론으로 갔던 유대인들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헤롯궁에 들러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헤롯 왕이 아기 예수를 잡아 죽이려 했던 것이지요. 바벨론 신화나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으면 안되는 겁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이집트로 피난살이를 갈 수 밖에 없었고 이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수 십 명의 아기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신화에서 흔하게 나오는 권력자의 권력 행사인가? 아니면 애가 서 저자가 말한 것 처럼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여러가지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후 예수님은 꿋꿋하게 사셨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셨고 갈릴리의 나사렛에 가서 사셨습니다. 네 살이 되면서 나사렛에서 가까운 찌포리에 가셔서 율법을 공부하셨고 랍비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서른 살에 동갑내기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지요. 그 공생애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부활로 이어졌고 부활은 우리에게 재림의 소망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소망입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망의 그늘 속에서 다시 힘을 내 몸을 추스려야 합니다. 이후에 애가 서 기자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동방박사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엄중한 인생을 살펴 봐야 합니다. 이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추워도, 더워도, 싫어도, 좋아도, 우리는 우리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실하게 그리고 꾸준히 우리 인생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이 인생의 길은 그리 먼 길은 아닙니다.

 

1) 예레미야가 극도의 좌절 속에 발견한 소망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또는 유다를 짓밟으셨다는 의마가 무엇입니까?

3) 애가 서의 영성에 대해 말해봅시다. 워드 플레이를 포함하여.

2021년 12월 19일

예레미야 애가  1장 1-11절: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누가복음 2장 8-14절: [0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0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애가 서 서론

  

애가 서의 외형율

애가 서는 모두 다섯 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 3장만 빼고 모두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제 3장은 66절까지 있지만 석 절씩 한 묶음으로 만들면 그게 22묶음이 됩니다. 한 묶음을 1절로 보면 제 3장도 역시 22절이 되는 셈입니다. 히브리어에서 22라는 숫자는 글자 수를 말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어 글자 22자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시를 하나 알고 있지요. 바로 시편 119편입니다.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법을 여덟 종류로 분류하고 각 종류에 한 절씩 배당해 모두 여덟 절을 만들고 이것을 한 연으로 만들었습니다. 시편 119편 기자는 이런 식으로 22연을 만들던 것입니다. 여덟 절로 한 연, 그리고 그 연을 히브리어 글자에 따라 22개를 만들었으니, 그래서 시편 119편은 모두 176절이 되는 것입니다. 애가 서도 히브리어 글자 22개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는데 시편 119편 보다는 정교하지 못해서 각 절 시작 단어의 첫 문자를 글자 순서에 맞춘 정도입니다. 그리고 제 5장은 절 수만 22절일 뿐 글자 순서를 맞추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애가 서가 히브리어 첫 글자 알렢으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 또는 연의 첫 글자는 ‘타브’겠네요.

애가 서의 내재율

애가 1.1-11, 2.1-10, 13-17, 4.1-16은 장송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2-22, 2.11-12, 18-22, 3.1-18, 48-66은 개인적인 애가라 할 수 있습니다. 3.42-47, 4.17-20, 5.1-22는 회중이 나누는 애가라 할 수 있지요. 각각 쓰이는 용도가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애가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적들을 저주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우르의 멸망’이란 수메르 문서와 비교하면 재미가 있습니다. 애가 서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때 부터 그들이 성전을 파괴한 때에 저술이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레미야의 애가라 했으니 예레미야를 저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 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그 난리통 속에서 히브리 문자까지 맞추어 가며 시를 지었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예레미야의 독백이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서 훗날 그 내용이 적혀진 게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애가 서에도 예레미야의 독특한 낙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에 처해도 낙관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애가 서를 읽으면서 이것을 발굴해 내는 것이 우리의 애가 서 묵상의 목적이 되겠습니다.   

 

에이카 - 애가(哀歌)

  

예수님은 가끔 ‘율법과 선지자들’이란 말을 쓰셨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하는 바로 그것인데, 이 책의 본래 이름은 ‘토라 느비임 베 케투빔’입니다. 이것을 각 단어의 앞 글자만 모아 ‘타나크’라 합니다. 타나크를 대강 번역하면 ‘율법과 선지자들과 지혜서들’이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 22.40에서 말씀하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우리는 타나크, 즉 구약성경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케투빔, 즉 지혜서라 하는 쟝르에 예레미야가 썼다는 ‘애가’가 들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서는 당연히 느비임, 즉 선지서 또는 예언서라 하는 쟝르에 들어가 있지요. 케투빔에는 시편, 잠언, 욥, 아가, 룻, 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역대기가 들어 있는데 이 중에서 아가, 룻, 애가, 전도서, 에스더를 ‘다섯 개의 메길로트’라고 부릅니다. 본디 메길로트는 다섯 개의 두루마리란 뜻으로 모세5경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절기에 사용되는 케투빔의 다섯 책들도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케투빔의 메길로트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케투빔의 메길로트를 해당 절기에 맞추어 각각 기도문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가 서는 유월절과 엘룰 월에, 룻기는 오순절에, 애가 서는 티샤 브 아브와 속죄일에, 전도서는 초막절에, 에스더 서는 부림절에 사용합니다.

The Cambridge Bible Commentary는 케투빔의 메길로트로 한 권의 책을 만들었습니다. 이 책은 다섯 권의 책들을 절기에 맞추어 잘 설명을 했습니다. 이번의 예레미야 애가 묵상은 이 책을 많이 참고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더블데이의 앵커 바이블 주석 중 ‘Lamentations’을 참고할 예정입니다. 물론 유대인 주석들은 당연히 사용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세와 그의 군대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탄식의 시로 남겼습니다. 이 시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아브 월 9일, 즉 티샤 브 아브에 사용합니다. 애가 서를 히브리어로는 ‘에이카’라고 합니다. 에이카는 에이크 동사에서 나온 것으로 의문사 또는 감탄사 입니다. 본문에는 슬프다!란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말로 옮겨지면서 그 제목이 ‘애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에이카를 음역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에이카를 한자어 哀歌를 생각하면서 애가로 음역하면 슬픈 노래가 되어 내용과 얼추 맞는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지요. 애가는 티샤 브 아브나 욤 키푸르에 무너진 성전 터를 바라보다가 또한 거닐다가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과격한 괴로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득 소망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활동하시며 우리를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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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라  

   

오늘 부터 애가 서로 들어갑니다. 애가 서를 히브리어로는 ‘에이카’라고 하지요. 주보 1면에 쓰인 네 개의 문자들, 즉 알렙, 요드, 카프, 헤이가 바로 에이카를 말하고 있습니다. 에이카는 탄식할 때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는 “슬프다!”라고 번역했네요. 그리고 에이카를 애가로도 번역했습니다. 에이카와 애가… 발음이 비슷합니다. 우리 말 번역자의 재치가 돋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애가 서, 즉 에이카를 메길로트라고 합니다. 메길로트는 다섯 권 한 질이란 뜻을 갖습니다. 그래서 본래 모세5경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 중 케투빔에 또 메길로트가 있습니다. 절기에 기도문으로 사용하는 책인데 모두 다섯 권으로 아가 서와 룻 기와 전도서와 에스더 서와 지금 우리가 다루려는 애가 서가 케투빔의 메길로트에 해당합니다. 애가, 즉 에이카는 티샤 브 아브와 욤 키푸르 때 기도문으로 사용이 됩니다. 그리고 아가 서는 유월절에, 룻 기는 오순절에, 전도서는 초막절에, 에스더 서는 부림절에 각각 기도문으로 사용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주일까지 우리가 다루었던 예레미야 서는 예언서에 속하는데 오늘 부터 우리가 다루는 애가 서는 지혜문학서인 케투빔에 속하게 되네요. 물론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말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예레미야 서와 애가 서가 모두 선지서에 속하지요.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예레미야 서가 예언서에 속하고 애가 서, 즉 에이카는 케투빔, 즉 지혜문학서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서와 지혜문학서는 아무래도 해석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애가 서 1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애가 서 1장은 모두 스물 두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 애가 서 1장을 읽으면 이게 예레미야 서와 다른 점이 뭘까…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전으로 에이카를 읽으면 당장 나타나는 외형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 1절의 첫 단어는 히브리어의 첫 글자인 알렢으로 시작하는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제 2절은 히브리어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로 시작하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22절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제 22절의 첫 단어는 스물 두 번째 글자요 마지막 글자인 타브로 시작하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이카 제 1장은 히브리어의 스물 두 개 문자들을 모두 동원해서 순서대로 스물 두 개의 절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은 제 2장에도, 또한 제 3장에도, 그리고 제 4장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두 제 1장처럼 히브리어 스물 두 개의 문자들을 차례로 사용한 절을 만들어서 그 장의 내용을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3장은 66절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한 문자에 석 절을 사용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3장을 읽을 때는 3절씩 끊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물 두 개의 문자들을 가지고 각 문자 당 한 문장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지막인 제 5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후에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어의 스물 두 문자들을 각각 한 절씩 사용해서 시를 만든 것을 우리는 시편 119편을 묵상할 때 이미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애가 서는 시편 119편 처럼 정교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제 5장은 이런 워드 플레이가 보이지 않지요. 이게 좀 유감스럽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도 에이카, 즉 애가 서를 묵상하는 중요한 목적이 되겠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묵상한 예레미야 서와 이제 묵상을 시작하는 예레미야 애가 서는 각각 쟝르가 다르다는 것을 마음 속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쟝르가 다르다는 것은 해석의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혜문학서는 선지서 처럼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에이카, 즉 애가 서는 주전 586년을 전후하여 쓰여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책에서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하는 내용을 발견합니다. 이런 이유로 에이카, 즉 애가 서는 아브 월 9일 성전 파괴일과 티슈리 10일의 속죄일에 기도문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절기라서 애가 서도 우리의 관심을 별로 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우리는 에이카를 묵상할 예정입니다. 아마 몇 주간이 되겠지요? 그러면서 깊고 긴 겨울의 어두움 속에서 유대인들이 피워 올렸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저력을 길러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에이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혜의 불을 피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에이카, 즉 애가 서 1장 1절 부터 11절까지는 레퀴엠이라고 합니다. 레퀴엠은 우리 말로 진혼곡으로 이해되고 있지요. 작년 6월 24일 밤에 국군 유해 147구가 하와이에서 돌아 온 일이 있습니다. 모두 카투사 출신으로 북한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유해라고 합니다. 신원이 밝혀 진 유해는 이 가운데  단 일곱 구 뿐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김석주 일병의 유해가 가장 먼저 내려왔습니다. 그 유해를 들고 있는 사람은 김석주 일병의 증손녀 김혜수 소위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간호장교였습니다. 장교가 된 손녀가 증조부의 유해를 안고 내려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때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소위 늙은 군인의 노래라는 것이었습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으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이 노래는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통령 앞에서 진혼곡이 되어 있었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가장 많이 좋아한 사람들은 역시 군인들이었지요.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노래, 그것이 바로 진혼곡이고 레퀴엠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예레미야 애가 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관련된 여러 책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제 눈에 들어 온 것이 케임브릿지 바이블 커멘터리였습니다. 이 커멘터리에 따르면 애가 서는 진혼곡과 개인 독백과 단체 낭독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쟝르가 다른 것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각각의 쟝르에 따라서 애가 서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케임브릿지 커멘터리에 따르면, 애가 서의 1장 1절 부터 11절까지는 레퀴엠, 즉 진혼곡입니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지요. 12절 부터는 또 다른 쟝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1장 1절 부터 11절까지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에이카, 즉 애가 서는 히브리어의 스물 두 개 문자들을 순서대로 사용하는 워드 플레이로 만들어져 있다고 했지요? 애가 서 1장 1절 부터 11절까지 살펴보면 과연 그렇습니다. 히브리어의 첫 번째 글자 부터 열 한 번째 글자까지 차례대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 1절은 히브리어의 첫 글자인 알렢으로 시작하겠지요. 그 1절은 이렇습니다. 에이카 야슈바 바다드… 슬프다 홀로 앉았구나… 전에는 붐비던 성이었는데 이제는 적막하구나… 그다지도 크던 자가 과부가 되었고 공주였던 자가 노예가 되었도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과부와 노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부와 노예는 관계가 있는 표현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과부가 되고 과부는 노예로 전락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그랬습니다. 남편의 죽음으로 신분이 변하는 여자의 모습을 이스라엘에 빗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너전 성전 터로 가보았습니다. 무너진 성벽 위에는 까마귀가 앉아 울어댔고 들개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적막한 곳에서, 과부 노예, 즉 이스라엘은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2절은 히브리어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로 시작합니다. 빠코 티브케 빠 라일라… 울고 또 울고… 밤마다… 과부 노예가 우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도 우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밤이 되면 더욱 더 울고 싶어 집니다. 밤 그 자체가 괴롭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목놓아 울었습니다. 더 이상 과부 노예를 위로하는 자가 없습니다. 잘 나갈 때는 그리도 뻔질나게 찾아와서 사랑한다고 결혼해 달라고 난리를 치더니 그런 호시절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친구들은 다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사가 그렇다는 것을 물론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섭섭하고 슬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목놓아 울 뿐입니다.

3절… 히브리어 세 번째 글지인 김멜로 시작합니다. 깔타 예후다 메오니 부 메롭… 유다는 서러움과 핍박 속에 끌려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이 과부 노예처럼 남아서 낮에는 적막하게 지내고 밤에는 울어야 했던 것은 유다가 끌려 갔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부당하게 바벨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양처럼 유다는 바벨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들은 쉴 곳도 없었습니다. 적들은 피곤했던 그들을 순식간에 덮쳤습니다. 그리고 노끈으로 그들의 손과 발을 묶고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4절… 히브리어 네 번째 글자인 달렏으로 시작합니다. “따르케이 치욘 아벨로트 미쁠리 바에이 모에드…” 시온의 대로가 목 놓아 웁니다. 절기 때가 되어도 찾는 사람들이 없어서… 대로가 적막한 그 자체를 대로의 방성대곡으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가 되면 모든 성인 남자들은 성전에 모입니다. 전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다 오기 때문에 시온으로 향하는 대로가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로 조차 적막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개의 문들은 다 부숴져 버렸습니다. 어디론가 피신해 있다가 돌아온 제사장들은 다행히 바벨론으로 잡혀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사장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탄식 뿐이었습니다. 제사장들과 함께 일부 처녀들도 남았습니다. 처녀라 함은 아직 순수한 신앙을 지닌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탄식하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시온, 즉 예루살렘이 미증유의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다 무너졌으니, 사실 이런 상태를 어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한심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인 예루살렘은 백지 상태가 되었습니다.

5절… 히브리어 다섯 번째 글자인 헤이로 시작합니다. “하이브 차레이하 레 로쉬…” 적들이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팔 다리를 저들이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원수들이 하는 일들은 다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가 죄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랑떼를 먹이셨습니다. 심지어 나의 어린 딸과 어린 아들 조차 적에게 사로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제 나의 미래도 없어졌습니다.

6절… 히브리어 여섯 번째 글자인 바브로 시작합니다. “바예체아 민 바트 미빠트 치온…” 시온의 딸들, 그 딸들로 부터 모든 영광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은 풀을 찾지 못한 사슴들 처럼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타버린 예루살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인들은 성전이 없는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7절… 히브리어 일곱 번째 글자인 자인으로 시작합니다. “자크라 이루샬라임 여메이 아느야흐…” 기억하라 예루살렘이 고통을 당하는 날을… 예루살렘에 그 얼마나 많은 기쁨이 있었던가요?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의 백성은 대적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돕는 자는 없고 오히려 그 멸망을 비웃는 적들만 있습니다. 그 적들도 한때 예루살렘의 친구들이었지요.

8절… 히브리어 여덟 번째 글자인 헤트로 시작합니다. “ㅋ헤트아 ㅋ하트아 이루샬라임…”  부정하고 부정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영광을 돌리던 자들이 이제는 그 헐벗음을 보고 오히려 욕을 합니다. 우리는 탄식하면서 몸을 숨길 수 밖에 없습니다.

9절… 히브리어 아홉 번째 글자인 테드로 시작합니다. “투므아타흐 쁘슐레이하…” 더러운 게 옷술에 묻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한 없이 낮아져도 찾아와 위로해 주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모르는 원수들이 잘난 척을 합니다. 부디 이 환난을 눈을 부릅 뜨고 지켜보시옵소서.

10절… 히브리어 열 번째 글자인 요드로 시작합니다. “야도 파라쉬 차르 알…” 적이 그 손을 뻗쳐서 모든 보물을 빼앗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은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잖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거침 없이 성소에 들어왔습니다. 예루살렘은 그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11절… 히브리어 열 한 번째 글자인 카프로 시작합니다. “콜-아마흐 네에나ㅋ힘…” 모든 백성이 살기 위해서 보물을 내놓고 양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식량은 떨어졌고 우리는 다시 양식을 구합니다.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를 돌아보시옵소서.

오늘은 여기까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가 서에 입문 하면서 확실히 기억해 둘 게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본래 성전 중심의 신앙을 키워 왔다는 것이지요. 성전 중심의 신앙은 출애굽과 함께 시작된 40년 광야 시절의 성막 중심의 신앙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성전 중심의 신앙은 사실 그들의 신앙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시대에 그 성전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바베론으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의 멘탈 상태는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가 서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유대인들 가운데 퍼졌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9절과 10절과 11절에 하나님을 찾는 기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9절에서 애가 서 기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원수들이 잘난 척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 환난을 눈을 부릅 뜨고 지켜 보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은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지만 그들은 거침없이 성소로 들어왔다고 토로합니다. 11절에서는 식량이 떨어졌으니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라고 간구합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이라고 한다면, 성전이 파괴 되었을 경우, 하나님은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정복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신을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무너진 성전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찾았단 말이지요. 그리고 애가 서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성전 중심의 신앙을 버리고 만물의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발전이었습니다.

성전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 본 그들은 메시야를 대망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마지막 주간인데요, 대림절이 기독교 전통인 것 같지만 사실 저작권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인간의 모습으로 메시야를 보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싸우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 연장선 위에서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고 또한 하누카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지요. 마카비는 유다 지파였고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윗의 혈통인 하스모니안 왕가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하스모니안 왕가가 헤롯 왕가에게 무너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헤롯 왕가는 에돔 족속의 혈통이기 때문에 결코 메시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헤롯 왕가에 저항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혁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가운데는 칼 두 자루를 품 안에 품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밤 중에 들판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늘로 부터 멋있게 내려 온 천사가 아니고 그들 곁에 불쑥 나타난 천사였습니다. 때를 같이 해서 주의 영광이 그 목자들을 두루 비추었다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떤 싯츄에이션일까요? 일단 목자들이란 바닥 인생들이었습니다. 메시야와 함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품 안에는 칼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었지요. 지팡이로는 양떼를 인도하고 막대기로는 늑대 등 양떼를 습격하는 동물들을 후려 치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불쑥 나타난 천사와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빛이 무서웠을까요? 그래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말하기를 “무서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이 천사가 누구길래 바닥 인생들인 목자들에게 이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단 말인가… 천사장 가브리엘 아니면 미가엘이겠지요. 천사는 계속 말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다윗의 동네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베들레헴을 말합니다. 헬라어 그리스도는 메시야의 번역어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셨으니 그는 유대인들이 아도나이라고 부르는 주님이란 말이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는 유대인들을 위해 말을 타고 긴 칼을 휘두르며 오는 성인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관우나 조자룡 같은 용맹스런 장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장 가브리엘인지 미가엘인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유대인의 엘리트들이 아니라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뜨악해 했습니다. 아기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천사장은 유대인의 상식을 뒤엎는 말을 계속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유대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표적입니다. 표적이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신비한 사건이나 현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천사장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가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 아기들은 강보에 싸여 침대에 뉘이지요. 말이나 소가 죽을 먹는 구유에 뉘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천사장이 말하는 아기는 지하 마굿간에 있는 죽통, 즉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이 표적을 신실한 마음과 섬세한 눈을 가지고 살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천사장의 말이 끝나자 홀연히 수 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말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목자들이 있던 곳은 북극 지방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라와 같은 휘황찬란한 현상이 그들의 눈 앞에서 펼쳐졌습니다. 오로라는 고요한 밤 하늘의 불꽃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자들은 하늘의 코러스를 목격했습니다. 천군 천사들은 합창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토벤 9번 교향곡도 이 합창에 비할 수는 없지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그것이 천군 천사들의 합창의 가사였습니다. 영광과 평화… 이것은 할렐루야와 샬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백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목자들이 그 최고의 가치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밤 하늘에 충만했던 천군 천사들의 공연이 끝나자 한 동안 멍-해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서로 툭툭 치면서 베들레헴으로 가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의 지하 마굿간을 찾아갔고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사장이 한 말을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난 지 8일 만에 모세의 법에 따라 할례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지하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이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우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굿간과 관련이 있는 목자들이 찾아와서 천사의 말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전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전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게 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었습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새 시대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크리스마스의 전통은 예루살렘 성전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그 성전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기독교 역사가 2천 년이 되어 가면서 예수님은 다시 갇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도 갇히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인데 이게 교회의 영광과 교회의 평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영광과 교회의 평화는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에 달려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가 없으면 교회의 영광도, 교회의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벨론 시대의 유대인들 처럼 애가를 쓰느냐 아니면 예수님 시대의 목자들 처럼 하늘의 코러스를 듣느냐… 이 두 가지의 기로 위에 서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토요일에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우리는 이전 처럼 성탄절 파티를 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 때문이지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서있는 천사장의 말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아름다운 것을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1) 히브리어 글자에 맞추어 애가 서를 쓴 사람의 마음을 말해 봅시다.

2) 오늘 애가 서 본문을 레퀴엠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3) 애가 서 기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이교회의 케투빔 마지막 파라샤트로 '예레미야의 애가'서를 다룹니다. 욤 키푸르 때 사용하기 위해서 이런 배열을 택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슬픈 책이 5장으로 이루어진 예레미야의 애가가 아닌가 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이 말에 대해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는 극비 사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자신도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범부도 그렇지 않을텐데 소위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를 학수고대 하기 어렵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어깃장! 하나님의 어깃장에 순종한 예레미야는 동족에게 갖은 학대를 다 당했습니다. 다른 수 많은 선지자들은 예레미야가 제 정신이 아니며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제 정신이 아니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슬프고 슬펐겠지요. 그 역시 예루살렘의 안정과 평화를 선포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라고 하나님께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리 봐도 눈물이었고 저리 봐도 눈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바벨론의 이교도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물론 성전까지 기어이 파괴가 되고 말았고 그 안에 있던 모든 성물들은 약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에 사용이 되었던 모든 것들이 폭도들의 전리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에 예레미야는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거늘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비극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오랜동안 인내하시던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침략을 허락하신 겁니다. 이 책을 통해 욤 키푸르 때 무엇을 회개해야 되는 지 알 수 없는 분들은 회개거리에 대해 힌트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1. 폐허 앞에서

 

예레미야 앞에 전개 된 것은 그의 말대로 이루어진 폐허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했지만 그가 그것을 바랐던 건 결코 아니지 않겠습니다. 그도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였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던 예배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루살렘 성전의 폐허를 눈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의 심정은 역시 흐르는 눈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참으로 많은 눈물을 주셨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눈이 아니고 샘같이 여겨졌을 겁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린다고 폐허가 없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폐허 위에서는 이교도들의 약탈 행위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바벨론 군인들은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렸고 거기다 실례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절기를 지키러 올라와 즐겁게 찬양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이교도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모독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폐허를 보고 지나가던 이교도들이 하나님을 비웃었고 이스라엘 백성을 비웃었습니다. 유별나게 놀더니 결국 망해 버렸군... 이 모든 괴로움은 결국 예레미야의 몫이었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운명이란 걸 그는 예전에 몰랐습니다.

 

2. 그래도 소망의 풀은 피어난다!

 

하지만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도 들풀은 다시 솟아났습니다. 화염이 가득했던 밤이 지나니 동편에서 기운찬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을 이교도들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매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조심스럽게 희망을 가져 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게 아닌가... 그는 풀을 보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서 긍휼함을 베푸시면 모든 게 가능하다고...  

 

3. 무서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마음 속에 작은 소망의 불씨를 피웁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무섭습니다. 이교도들이 예루살렘의 여자들을 짐승 사냥하듯 사냥합니다. 어린 것들이 너무나 많이 희생됩니다. 정복의 대가라지만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입니다.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더 절망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애가 서는 현재 진행형으로 끝이 납니다. 

 


2010년 9월 26일 주일설교

 

바벨론 패망

 

예레미야는 10대 때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이후 42년 동안 예언활동을 했다고 합니다그러나 그는 쑥과 같이 쓰라린 상처가 연속되는 삶을 살았습니다예레미야 당시 유다 왕국은 남으로는 이집트에게북으로는 바벨론에게 협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생소한 바벨론보다 친숙한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사실 이집트는 북왕국을 세운 여로보암 1세 이후 이스라엘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그래서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할지언정 이집트와의 동맹은 불가하다고 줄기차게 말했습니다그러니 바벨론 사람들 외에는 예레미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동족인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예레미야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은 이집트를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이후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은 물론 성전까지 초토화시켰습니다수 많은 엘리트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갔습니다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에서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 여자들과 이이들을 사냥했다고 합니다하지만 바벨론 군대는 예레미야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그들로서는 예레미야가 공로자이기 때문입니다바벨론에게 망할지언정 이집트와의 동맹은 절대로 안된다… 예레미야는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이것이 바벨론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적행위였습니다물론 예레미야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 자신의 소견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평화의 사절도 아니었고 정의의 사도도 아니었습니다그들은 이집트 군대와 다름없는 무자비한 정복자였습니다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저지른 만행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애가서에 기록했습니다사실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대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게 항복을 하면 그래도 성전 만은 온전할 줄 알았습니다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유대인 공동체는 해체되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남은 자들은 여자와 아이까지 학살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예레미야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하나님이시여나로 하여금 이 꼴을 보게 하시려고 바벨론과는 싸우지 말고 차라리 항복하라고 하신 겁니까그래서 이집트와 동맹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파괴된 성벽에 앉아서 과거를 생각해 봅니다그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집트와 동맹하지 말라고 했습니다그때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벨론의 첩자라고 꾸짖었습니다예레미야는 억울해서 울었습니다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이후 바벨론 군대가 유대인들을 공격할 때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바벨론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그것이 너희들이 살 길이라고 했습니다그때 수 많은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향해서 너는 정말로 바벨론의 첩자로구나 라고 욕을 했습니다예레미야는 또 억울해서 울었습니다결국 예레미야는 왕궁 감옥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이후에도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그러다 후배에게 따귀를 얻어 맞고 왕궁 경호대 감옥에 갇혀 버렸습니다그때도 예레미야는 억울해서 울었습니다바벨론 군대가 들어오자 모든 유대인 엘리트들은 포로로 잡혀 갔지만 예레미야는 석방이 되었고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그러나 그는 바벨론이 준 자유로 못 볼 것들만 보고 말았습니다그의 두 눈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어떻게 초토화 되는 지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예레미야는 또 하염없이 울었습니다이후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전쟁터의 종군기자처럼 예루살렘과 성전의 최후를 생생하게 목격한 예레미야는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그의 마음 속에는 허무와 공허와 무서움이 자리를 잡았습니다명색이 선지자인데도 그가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오히려 그는 동족으로부터 배신자라는 욕을 듣고 있었습니다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대가였습니다.

실의에 빠진 예레미야는 초토화된 예루살렘 거리를 걸어 보았습니다폐허가 된 성전 터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하나님께 예배 드리던 장소가 바벨론 군대의 파티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파티 하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절기를 지키러 온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대제사장이 속죄일에 단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그 거룩한 지성소… 그 자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바벨론 군대가 하나님의 지성소를 어떻게 모독했을까요저는 그곳이 공중 변소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예레미야가 초토화된 예루살렘 거리를 걸어서 성전 터에 올라가 본 때는 아마도 초막절 이었을 겁니다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때가 주전 586년 아브 월 9일이었습니다그 해의 초막절이 오기 두 달하고도 닷새 전이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성전 터 방문은 초막절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막절에 바라보는 성전의 폐허… 특별히 초막절 마지막 날인 호샤나 라바즉 큰 구원의 날에 돌아본 지성소… 그 지성소에서 발견되는 이교도들의 하나님께 대한 모독… 예레미야는 절망에 빠졌습니다이제 예루살렘에서는 룰라브를 들고 초막절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그 대신 창과 칼을 든 바벨론 군대가 거룩한 장소를 통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이 광경을 보고 예레미야의 심장은 고초와 재난즉 쑥과 담즙이 되고 말았습니다진정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새 날은 온다

하지만 성전의 폐허 속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뭔가를 보았습니다초막절이 지나 갔지만 세상은 끝이 나지 않고 또 다시 태양이 올리브 산 위로 떠올랐습니다성전은 망해도 해는 뜨는구나… 예레미야는 그렇게 주절거렸을 겁니다그런데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이 있었습니다밝은 아침 햇살이 비쳐 준 것은 폐허의 돌무더기를 헤집고 나오는 쑥이었습니다어저께 그가 비통의 상징으로 하나님께 내뱉었던 바로 그 쑥이 폐허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던 것입니다오늘 본 쑥은 더 이상 비통이 아니었습니다그것은 오히려 소망과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비록 작고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예레미야는 그 쑥을 보고서야 비로소 하나님께 대한 원망의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그는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그리고 그는 평생 의지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합니다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경건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예레미야의 고백처럼 잠잠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우리의 급한 성품이의분에 차서 몸을 떠는 성품이 우리를 참지 못하게 합니다그래서 내 힘으로 구원을 만들려 하고심지어 돈으로 구원을 사려고 합니다하지만 이런 행동이 가당키나 합니까경건한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초막절 나흘 째 되는 날입니다그리고 주일입니다우리는 초막절 중간에 들어 있는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기로 했습니다그런데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바로 구원에 대한 소망과 희망 때문에 우리는 초막절의 주일에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이번 주 수요일 일몰부터 목요일 일몰까지가 호샤나 라바의 날즉 큰 구원의 날입니다유대인들은 이 날 메시야가 오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로 이 날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요저는 만약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면 바로 이 날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호샤나 라바의 날즉 큰 구원의 날에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지 않으시면그러면 우리의 소망과 희망은 1년 연기가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예레미야 처럼 새로운 태양과 그 햇살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쑥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잠잠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이것은 우리에게 결국 그 구원은 반드시 온다는 확신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라

예레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가 되고 말았습니다이후에 제성전이 건설이 되었다고 합니다그러나 제성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성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온전한 의미의 성전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사라져 버렸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이 대부분 사라져 버렸는데 제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오늘날 유대인들 가운데 90% 이상은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인들과 유전학적으로 비교해서 다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바벨론 제국은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해 나라가 없어졌습니다그러나 바벨론 왕조는 연명을 하다가 주전 331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 의해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그런데 바벨론이란 말은 바벨 즉 혼돈이란 말의 그리이스식 발음입니다성경에서 말하는 바벨론은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한 집단이고또 예레미야가 증언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사라지게 만든 집단이며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 백성과 함께 가는 악의 집합체를 말합니다그런데 이런 바벨론이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드디어 멸망하게 됩니다우리 예수님께서 단행하시는 최후의 심판이 바벨론 패망으로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바벨론은 참으로 더럽고 끈질긴 세력입니다요한계시록은 바벨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처소요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이며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다땅의 왕들이 음행 하는 곳이며땅의 장사꾼들이 돈을 버는 곳이다.”

이런 이유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아거기서 나와서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셨다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하루 동안에 그에게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시다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바벨론은 언뜻 보면 평화롭고 자유롭고 공평한 곳 같습니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꿈을 안고 바벨론으로 몰려 듭니다하지만 그곳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무시되는 곳입니다그래서 온갖 이데올로기와 온갖 행위가 다 용납되는 곳입니다그래서 돈과 권력을 쥐면 최고의 가치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입니다그런데 바벨론에서 최고의 가치는 음란입니다그래서 이 음란을 이용하면 엄청난 돈을 벌 수가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음란을 위해 사치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들을 낭비하는 곳이 바벨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이 있는 바베론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 즉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그러나 이번에는 지리적으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바벨론에 있는 음란한 자들에게 고난과 애통을 주라는 것으로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바벨론에 있는 음란한 자들에게 고난과 애통을 줄 수 있겠습니까그건 간단합니다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면 되는 것입니다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면 되는 것입니다이것은 경제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경제질서를 바로 세우면 바벨론에 있는 음란한 자들이 가장 괴로워합니다.

 

질문과 대답

1)  왜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야를 미워했습니까?

2)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멸망을 선언하라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3) 바벨론 군대가 성전을 파괴하고 한 짓들을 이야기해 봅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소망을 갖는 구체적인 물증이 무엇입니까?

5) 무서운 현실 속에서 예레미야가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입니까?

6) 고난을 이겨낸 한국교회의 오늘의 모습을 이야기해 봅시다.

7) 속죄일에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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